아. 휴가요? 지난 9월에 오키나와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4박 5일 동안이요. 네. 혼자 다녀왔습니다. 혼자 가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조금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아. 좋습니다.
원래 혼자 떠날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친구와 가려고 했지요. 네. 아주 친한 친구지요. 대학 동기인데 저와 맘이 참 잘 맞고, 재치와 학식이 풍부한 녀석이랍니다. 함께 있을 때, 서로의 유머가 상생하며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그런 친구 사이 말이지요. 사람들에겐 저마다 그런 친구가 한 명씩은 있는 것 같더군요.
아무튼, 전 그 친구와 함께면 여행이 훨씬 재밌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친구와는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요.
5월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함께 어디 가보지 않겠느냐고. 그랬더니 친구도 흔쾌히 좋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자리에서 저희 둘은 어디 가자 어디 가자며 벌써 엉덩이를 들썩였지요.
둘 다 더 멀리까지 갈 여유는 없으니, 가까운 곳 중에 왠지 이름부터가 끌리는 '오키나와'로 항로 설정을 했습니다. 친구가 9월 정도에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해서 그때 떠나는 것으로 말을 맞췄지요.
그리고 며칠 후에 제가 두 사람의 비행기 표를 서둘러 예매했습니다. 미리미리 해야 더 싸잖아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귀찮다'는 마음이, '혼자 가는 게 나을까'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달력이 8월 정도로 넘어가며 슬슬 여행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오니 말이에요. 이 친구가 약간 번거로운 녀석이 돼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행 계획을 짜야 할 것 같은데, 친구는 바빠서 그런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고, 저도 계획 짜고 그런 걸 좋아하지 않으니 진행이 안 되고 있었지요. 사실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갈 때, 준비과정이 꽤 귀찮지 않습니까. 계획 잘못 세웠다가 나중에 원망 들으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먼저 가자고 한 입장인지라, 친구에게 계획을 짜라 하기도 좀 그랬습니다.
사실 혼자 가는 거면 뭐든 제 맘대로 하면 되는데, 둘이 같이 가는 거라 숙소 하나 정하더라도 친구의 반응이 신경 쓰이잖아요. 어쨌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퇴근 후에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아, 우리 여행 계획 짜야 하는데. 하하."하며 친구에게 여행이 다가오고 있음을 자연스레 상기시켰지요.
그런데 녀석이 "근데, 나 아직 여자친구에게 여행 얘기 안 했는데, 반대하면 어쩌지."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때 마침 친구가 연애를 시작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저와 여행 약속을 한 후에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지요.
그럼 제가 '아니, 나와 먼저 약속을 한 건데 그게 무슨 소리냐. 여자친구의 허락이 왜 필요하냐.'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겠지요.
하지만 앞서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제 속에 그냥 혼자 가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와 있었다고요. 그래서 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뉘앙스로 "그래. 조심스럽게 물어보렴. 아직 비행기 표는 안 샀다고 해."라며 오히려 우리 여행을 취소해도 괜찮다는 쪽으로 문을 열어주었지요.
아마도 그때 저는 친구의 그 말을 조금은 반가워했던 것 같습니다. 여행 얘기를 먼저 꺼낸 제가 약속을 어길 순 없으니, 친구가 그래 준다면 맘 편히 친구를 원망할 수도 있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 후로도 저는 친구와 연락을 할 때면, 여자친구에 물어봤느냐며 나는 괜찮으니 어서 물어보라며, 녀석이 '여자친구가 못 가게 한다'는 대답을 하길 기다렸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친구가 '미안해. 여자친구와 여행을 가야 할 것 같아. 하필, 여자친구도 9월에 휴가지 뭐니.'라는 문자를 보냈을 때, 전 '아. 그렇구나. 괜찮아. 난 언제나 너의 뒤에 있을 테니까.'라는 감미로운 메시지로 화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 마음이 참 교묘한 것이, 막상 친구가 못 가게 되었다고 하니 서운함과 배신감이 생기지 뭡니까.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이건 서운하게 느껴야 해. 배신감을 느껴야 해.'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사실 혼자 가길 원했으면서 말입니다.
혹시 그런 걸까요. 제가 악역이 되기 싫어서, 친구를 배신자로 만들려는 마음이었던 걸까요. 저 자신을 사랑과 우정의 영역 다툼 속에서 짓밟힌 가련한 피해자로 연출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래서 가상의 서운함과 배신감을 주조해서 자신을 기만했던 것일까요.
네. 맞습니다. 참으로 비겁한 마음이지요.
흠. 결국, 친구의 비행기 표는 취소하고 저 혼자만 오키나와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홀로 보낸 날들은 심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