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후루 Nov 03. 2015

알 없는 안경

지금 전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경알은 없답니다. 네. 멋으로 쓰는 안경이지요.


예전에 라식 수술을 받아서 시력이 좋아졌거든요.


수술을 받고 나서는 안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안경을 벗고 싶어 수술을 받은 것이니까요.


그렇게 몇 년 동안, 안경은 쳐다보지도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요.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던 중에 어느 팬시 샵에 들렀습니다.


독특한 디자인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었지요. 마침 그곳에는 안경이나 선글라스도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전 재미 삼아 안경도 써보고 선글라스도 써보고 했지요. 그중에 해리포터 안경처럼 동그랗고 귀여운 것이 있어 한 번 써보았습니다.


쓰고서 거울을 보니 제 모습이 그리 나쁘지 않더라고요. 여자친구에게도 보여주며 어떠냐고 물어보았지요.


그랬더니 안경을 쓴 게 더 낫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야 얼굴이 완성된 것 같다고요. 뭔가 좋으면서도 좋지 않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가격은 이만 구천 원이라 부담스럽지는 않았지만, 안경이 굳이 필요한 것은 아니어서 구매를 한참이나 망설였지요.


그렇지만 더 멋져질 수 있는 가능성을 놓치고 싶지 않아 결국 사고 말았습니다.


바로 쓰고 다녔지요. 하지만 안경알은 없었습니다.


전 당연히 도수 없는 안경알을 따로 사서 끼워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런 저의 생각을 여자친구에게 전하니, 그녀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멋으로 쓰는 건데 알이 없으면 어떠냐는 것이었습니다.


전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싶어 그냥 쓰기로 했지요.


그렇게 알 없이 안경을 쓰고 다니는데, 자꾸만 뭔가 찝찝하지 않겠습니까. 


남들이 '저 사람은 돈이 없어서 알을 안 넣었구나'라고 생각할 것만 같고. '알이 없는 거 보니 멋으로 쓰고 다니는 거네 멋 부리기는'이라며 비웃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여자친구에게 저의 그런 고민을 털어놓았지요.


그랬더니 "정말 부자나 멋쟁이라면 안경에 알이 있든 없든 신경 안 쓸걸"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어찌나 부끄럽던지. 저는 명백하게 소심했습니다.


왜 저는 '그래 난 멋으로 쓴 거다, 멋져지고 싶어서'라며 당당하게 가슴을 펴지 못했을까요. 왜 멋에 관심 없는 척하면서, 멋있게 보이고 싶어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던 걸까요.


여자친구의 냉철한 일침 덕분에 전 지금까지 알 없이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라식 수술을 받은 것이 아깝지는 않습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쓰는 것과 알 없는 안경을 쓰는 건 아주 다르니까요.


알 없는 안경은 사실 장점이 많습니다. 우선 가볍습니다. 알이 생각보다 무게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뜨거운 음식을 먹거나, 비 올 때 버스를 타도 김이 서리지 않습니다. 더러워질 알이 없으니 닦을 필요도 없지요.


뭔가 쿨한 느낌도 있습니다. 정말이에요. 안경 자체가 '뭐 어때?'라며 으쓱하고 있는 것 같달까요. 조금 오버인가요.

















매거진의 이전글 긍정 필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