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마주한 사라진 계절, 그리움으로 다시 살아나다
가을이 없는 동남아
나의 가을은 창밖이 아니라, 기억속에서 꺼내야한다
젖은 단풍잎이깔린 길바닥, 차가운 새벽공기, 한가위 기름진 향기
내게 가을은 더이상 계절이 아니다
잃어버린 계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풍경이다
낯선땅에서 오래 살다보면, 오히려 한국인 정체성은 더 선명해진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나를 확인하는 중요한 의식이 된다
예를 들면 한글날
한국에 있을때는 그냥 지나쳤을 날이지만, 이곳에서는 언어를 지켜내는 기념일이 된다.
김장담는날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걸 증명하는 의미있는 행위가 되고,
추석 아침의 송편빚기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 내 뿌리를 확인하는 상징이 된다.
해외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는일,
실내에서 신발을 꼭 벗는 습관,
아이가 체했을때 손을 따는 작은 행동까지 이 모든 사소한 행위들이 곧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이고, 고향을 품은 마음이다.
가을이 오면 교민들의 마음도 묘하게 흔들린다
추석이 공휴일이 아닌 이 타국에서, 함께모여 송편을 빚으며 이 명절문화를 이어갈지, 아니면 조용히 넘어갈지 고민한다
지인중 하나는
사실 그 무게감에서 벗어나고싶어 한국을 떠났는데, 외국에 와서 먼저 나서 아이들에게 송편 빚는법을 알려주는 모습이 낯설고도 우습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런 순간마다 교민들은 묘한 공허함을 느낀다
가을은 병이다
깊이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로할 전문가도, 약도 없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계절을 견디고, 추억을 되새기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야한다
사라진 계절이 내게 생각의 여유를 주듯,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도 배움은 달라진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 또한 끊임없이 배운다
한국이었다면 선행학습을 하지않는다?
그것은 마치 혼자 교통질서를 지키며 늘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는 기분일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아이는 더욱 천천히, 더욱 자유롭게 성장한다
(그럴수밖에없는 환경에, 처음엔 눈물이 났지만)
성적 비교 대신 하루를 온전히 즐기는 법을 배운다
부모가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아이에게 줄수있는 가장 귀한선물임을 깨닫는다
가을은 부모의 마음에도 쉬어갈 쉼표가 필요함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결론은?
동남아에서 볼수없는 이 사라진 계절을, 나만의 시간으로 채운다
우연히 들른 현지 서점의 책,
친구와 나눈 깊은대화,
낯선 음악이 흐르는 저녁,
이 모든 것들이 단풍의 붉고 노란 색을 대신해 내면을 물들이고, 나를 어제보다 단단하게 만든다
외국에 산다고 해서 영어가 멋있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건 아니다
아이 학교 앞에서 만난 금발의 파란 눈을 한 학부모가 물었다
어제 숙제 힘들지않았냐?
나는 그저 동양의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파인,떙큐, 앤유? 만 반복했다
돌아오는길, 괜히 속상해 혼잣말로 대답을 연습했다
스몰토킹은 무난히 모면했지만 ,이불속 발길질은 오늘도 이어졌다
사라진 계절처럼, 놓쳐버린 말은 아무리 되짚어도 돌아오지않는다
멀리 있어 잊은 줄 알았던 계절,
그러나 우리 안에는 결코 사라지지않는다
해외에서 가을을 그리워하는 내 마음처럼,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도 삶속에서 문득 잃어버린 계절을 느낄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절은 늘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눈부신 단풍이 아니어도,
이글을 통해 한국에 계신 독자 여러분과 그 사라지지않는 계절의 온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