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만 바빠도 여행 떠날 하루쯤은 있겠지 #3
대전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별 것 아닌 이유였다. 룸메이트가 마침 설을 맞아 대전에 있는 본가에 내려갔고, 나는 서울에 남아 있어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대전에 갈만한 곳이 성심당밖에 없다고 대전 사람도 대전 안 사는 사람도 자조적으로 말하곤 하지만, 설마 정말 성심당밖에 없을 리가 없다. 그래도 광역시인데!
정월 둘째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새벽의 파르스름한 색깔을 참 좋아한다. 겨울인데도 공기가 차지 않다. 여행 가기 참 좋은 날씨다. 지하철에 올라 아침잠이 많은 룸메이트에게 모닝콜을 해주고,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 타자마자 잠들어 대전에 도착할 즈음 깨어났다. 프리미엄 고속버스도 지난 여행에 타 보았지만, 편안함과는 별개로 잠이 잘 오는 것은 역시 익숙한 우등고속버스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톡 하나가 와 있다. 어제 스케이트를 타보았더니 허리가 아파서 스킵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연락이다. 아쉽긴 하지만, 허리디스크 환자로서 ‘디스크 팡팡’의 위험은 감수하지 않는 것이 좋다.
대전은 광역시답게 고속버스 정류장이 여러 곳이다. 한밭수목원에 가장 가까운 대전청사 정류장에서 내리고, 다음 일정으로 계획한 이응노 미술관 앞에서 보기로 했다. 미술관에 먼저 도착해 사진을 찍고 있으니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엊그제 본 사이인데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이응노 미술관은 한국의 근현대 미술가인 고암 이응노 화백의 작품을 모아 놓은 곳이다. 분기별로 기획전, 특별전 등을 계획하여 진행하는데, 방문했을 때에는 소장품전인 <예술가의 방>이 전시 중이었다. 1904년에 출생한 고암은 한국에서 수묵화로 등단하여 일본 유학을 거쳐 50대에는 파리로 진출했다. <예술가의 방>은 파리 근교의 프레 생 제르베에 있던 고암의 작업실을 재구성하여 연출한 전시다.
사실 이응노 화백보다는 건축물 자체가 흥미로워서 방문한 곳이다. 프랑스 출신 건축가인 로랑 보두엥이 설계했는데, 고암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건축적으로 해석하여 디자인했다. 대전청사역에서 내려 15분가량 걸으면 한밭수목원 주차장이 보인다. 주차장을 지나면 오른쪽으로는 대전엑스포 시민광장 건물과 그 뒤에 있는 야외 스케이트장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밑이 오목한 반달 형태의 지붕을 똑같이 얹어둔 형제 같은 예술의 전당과 시립미술관 건물이 보인다. 시립미술관 오른쪽에 작은 콘크리트 건물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이응노 미술관이다. 미술관 앞에 있는 정원은 겨울이라 짧은 머리를 노랗게 물든 잔디가 정갈하게 깔려 있다. 그 위로 드문드문 돌로 만든 조각상들이 역광을 받으며 우뚝 서 있다.
정원에서 다시 고개를 돌려 미술관 건물을 바라보면 남향의 해를 받아 하얗게 빛나는 건물이 날아갈 듯이 서 있다. 온통 콘크리트로 만들었는데도 가볍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붕을 루버로 길게 뻗어냈기 때문이다. 건물 위에 세로로 얇게 켠 듯한 콘크리트가 나란히 열 지어 얹혀 있고, 땅에서 자라난 듯한 얇은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입구에 마찬가지로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가벽이 튀어나와 있는데, 가로로 긴 창이 나 있어 미술관 주차장과 숲, 그리고 산이 액자처럼 보인다.
입장하면서 팸플릿을 받아 보았다. 작은 미술관인데도 분기마다 다른 전시가 진행되고 있어 알차다. 입장권을 끊고 삐그덕거리는 나무마루로 된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니 1 전시실이 나온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평상 위에 놓인 작은 소반과 그 주변으로 알록달록하게 놓인 방석들이다. 정기적으로 다도 수업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한다. 한쪽 벽에는 파프리카와 여러 과일을 그린 수묵화가 있는데, 프랑스에 있는 아뜰리에에서 이 화백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린 수업용 그림이라고 한다. 지금은 이 화백께서 타계하여 부인이신 박인경 화백께서 계속 수업을 이어나가고 계시다. 박 화백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더 이어보려고 한다. 다도 교실 뒤로 장지문으로 구획된 공간이 있는데, 이 곳에서는 이 화백이 생전에 쓰던 도구들과 작은 그림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2 전시실은 미술관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소다. 공간에 들어가기 전에 프랑스 가요가 먼저 관람객을 맞이한다. 붉은 양탄자 위에 있는 작은 테이블을 둘러싸고 네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냉장고와 그릇장, 텔레비전, 그리고 스탠드 조명이 밝은 꽃무늬 벽지를 배경으로 세워져 있어 프랑스 가정집의 거실을 연상케 한다. 짙은 나무 색의 아름다운 원목 가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거실에서 한번 천장이 꺾여서 확 높아지는데, 이 높이차를 이루는 벽에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다. 그 옆으로는 높은 창이 있어 햇빛이 자연스럽게 들어오고, 그 창 아래로는 다 마스크 패턴의 푸른 벽지를 발라 놓았다. 꽃무늬 벽지도, 다 마스크 패턴의 벽지도 평소라면 절대 쓰지 않을 문양인데도 그림과 함께 있으니 아름다워 보인다. 푸른 벽지가 발린 면적이 꽤 큰 데도, 욕심 없이 작은 그림 세 점만 걸려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원형의 알록달록한 패턴을 그린 그림이다. 이쯤 되니 그림 설명에 작가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 궁금해져서 봉사자 분께 여쭤보니, 지금은 이응노 화백의 작품만 전시하고 있다는 대답을 받았다.
2 전시실에서 3 전시실로 가는 길은 유난히 세로 선을 강조하여 인상적이었다. 왼쪽 창으로는 미술관 바깥의 대나무 화단이 보인다. 오른쪽 창은 세로 결의 패턴이 그려진 유리였는데, 그 안으로 언뜻언뜻 중정의 초록이 보였다. 천정은 2 전시실의 높은 천장과 연결한 나무 루버가 걸려 있는데, 긴 통로 방향을 따라 길게 붙여져 있어 유난히 가늘고 길어 보인다.
가벽 사이로 난 아치 모양의 문을 통과해 나가면 왼쪽에 나무로 짠 작품이 하나 걸려 있다. 이응노 화백의 작품 제목은 ‘군상’, ‘문자 추상’ 등의 이름이 많은데, 이 작품도 수많은 ‘구성’ 중 하나다. 나무 프레임 안에 목수가 썼을까 상상이 되는 나무토막 여러 개가 콜라주 되어 있다. 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나무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긴 시간을 거쳐 하나로 모인 듯한 느낌이라 마음에 들었다. 이 작품에서 고개를 돌려 3 전시실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나무 이젤이다. 사실 이젤보다는 제도판으로 보이는 물건이다.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나무판 위에 조명이 달려 있고, 왼쪽에는 직각자가 금속 관절에 연결되어 나무판 위에 붙어 있다. 미술가의 작업실보다는 목수나 건축가의 작업실로 보이는 풍경이다. 중정 쪽으로 난 창은 아래로 낮게 뚫려 있고, 그 위로는 다양한 형태의 나무 조각이 놓여 있다. 맞은편으로는 복층을 희게 칠한 금속으로 짜서 설치했는데, 위에 올라가 중정 쪽 벽을 바라보니 나무 조각이 딱 시선에 맞게 배치되어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뷰가 새로워 한참을 앉아 있다가 내려왔다. 복층이 설치된 쪽 창에 나무로 세로 루버를 붙여 놓아 햇볕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스며든다. 프랑스의 봄날 속에 서 있는 기분이다.
마지막 4 전시실 한쪽 벽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걸려 있고, 일본에서 제작한 이응노 화백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있었다. 간첩으로 몰려 감옥살이를 하고 결국 프랑스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하다가 일본에 방문했을 때 찍은 영상이다. 한국에는 갈 수 없어 그나마 가장 가까운 나라로 간 것이다. 옥중에 그린 그림을 설명하고, 일본 거리를 걸으며 한국을 그리워하는 화백의 모습에서 인상적인 것은, 계속 부인과 함께 다닌다는 것이었다. 자막에 부인을 ‘박 화백’이라고 부르는 모습이 나오고, 이 분의 작품에 대해서도 잠깐 설명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화여대 미술과 제1회 졸업생인 박 화백은 이 화백과 마찬가지로 수묵화 작품을 많이 그렸다.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작품은 글씨의 두께를 이용해 그라데이션처럼 활용한 작품이었다. 인스타그램 영상에서나 보던 방법을 우리나라에 막 서양미술이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에 시도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지금에야 수묵화를 이용한 현대미술이 많이 시도되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이 이 부부의 작품을 얼마나 센세이셔널하게 받아들였을지를 상상하게 된다. 아쉽게도 영상에서도 박 화백의 작품을 짧게만 다뤘고, 작품 이미지는 아트샵에 있는 도록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올 겨울에 박인경 화백의 작품을 이 미술관에서 전시한다고 하니 다시 방문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온 후 로비로 나오니 입구에 있는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카페의 이름은 ‘프레 생 제르베’로, 이응노 화백이 살고 지금도 아뜰리에가 운영되고 있는 파리 근교 도시의 이름을 따왔다. 카페 뒤에 있는 아트샵을 구경했다. 이응노 화백의 그림을 새긴 배지와 책갈피, 노트 등을 판매한다. 특히 에코백이 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