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만 바빠도 여행 떠날 하루쯤은 있겠지 #4
미술관에서 나오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원래 가려고 한 곳은 도보 10분 거리의 냉면집이었는데, 설 다음 일요일이라 휴무라고 한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고민을 시작했다. 새로 맛집을 찾자니 귀찮고, 근처에 가자니 어딜 가야 할지 모르겠고, 이렇게 된 이상 카이스트 산책을 하러 가는 김에 학식이나 먹을까! 카이스트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메뉴를 찾아보니 휴일이라 다른 학생식당은 다 닫았고, 제일 크다는 카이마루 한 곳만 열려 있었다. 메인 메뉴가 제육볶음인 것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큰길로 나와 택시를 타고 카이스트로 향했다. 기사님께 “카이스트 학생식당이요!”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거기 운동장 하고 기계공학동 사이로 가서요, 사랑관 그쪽이요, 네네. 학생회관 쪽이요.”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말았다. 그게 뭐 부끄럽다고. 다행히 기사님은 우리를 무사히 학생식당 앞 건물에 내려주셨고, 우리는 복잡하게 얽힌 건물 사이를 돌고 돌다가 간신히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평소라면 학생이 바글바글할 것 같은 커다란 식당은 드문드문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만 고요히 앉아 있었고, 누가 봐도 방문객인 두 사람은 결제를 마친 후 도서관에 입장하는 기분으로 식판에 밥을 담았다. 샐러드는 싱싱하고 잡곡밥은 맛있었으며 제육볶음에는 고기와 함께 순대까지 들어가 있었다. 이 집 맛집이다.
배불리 먹고 나와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학생회관 건물은 바닥부터 벽까지 붉은색 벽돌로 마감되어 있다. 봄날 같은 햇살이 들어와 더욱 따스한 느낌이 든다. 양쪽에 자전거가 가득 세워져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나무에는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지만 정말 봄날이었다면 벚꽃이라도 휘날렸을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룸메이트가 일전에 방문했을 때 산책로가 좋았다며 나를 이끌었다.
노천극장을 지나 풍동실험동으로 보이는 건물을 끼고 돌아서 외국인 교수 아파트를 따라 내려오는 코스였다. 노천극장을 지나치려다 무대 아래에 있는 시설을 그냥 두고 지나칠 수 없었다. 대학교 내에서는 처음 보는 시설이다. 웬 코인 노래방이 있는 것이다. 요새 한참 흥이 나서 종종 둘이서 노래를 부르러 가곤 했는데, 카이스트에도 있을 줄은 몰랐다. 들어가서 한곡 부르려다가,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안내문을 보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언덕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가을의 옷을 입고 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마른 이파리가 나무 사이로 쪼개져 들어오는 햇살을 뒤집어쓰고 있다. 언덕 위에 두툼한 원통 위에 거꾸로 고깔을 뒤집어쓴 새하얀 풍동실험동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로는 웬 운동장 하나가 있는데, 경사가 있어 눈 오는 날 썰매 타기 좋아 보인다. 운동장 테두리에 둘러놓은 콘크리트 제방 위에 낙엽과 색깔이 꼭 닮은 치즈냥이가 한 마리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룸메이트가 신나서 인사를 했지만 지켜보기만 할 뿐 다가오지는 않는다.
실험동을 지나니 벤치 두 개와 철봉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사이좋게 번갈아 매달려 보았다. 고등학교 체력장 때는 30초도 넘게 매달려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손이 먼저 아파서 금세 내려왔다. 산길 끝에 외국인 교수 아파트에 둘러싸인 놀이터가 보인다. 나란히 앉아 그네를 타다가 시소에 엉덩방아를 찧다가 내려왔다. 소파 방정환 선생께서는 수명의 앞 3분의 1까지는 어린이라고 했다는 떠도는 말을 굳건히 믿는 두 명은 어린이 놀이터에서도 재미나게 노는 것이다.
카이스트 교내의 큰길을 따라 죽 내려오니 정사각형 창이 일정하게 뚫린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간삼건축에서 설계한 학술문화관이다. 학술문화관을 지나면 웬 다리 하나가 보이는데, 그 아래가 오리연못이다. 오리와 거위들이 연못 안에만 머물지 않고 보도까지 자유롭게 다닌다. 벤치에 앉아 잠시 쉬려니 거위들이 밥을 달라고 목청을 높인다. 가방 안에 빵도 없고 과자도 없어 눈치가 보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이스트에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것은 고등학교 때로 기억하는데, 널찍한 캠퍼스에 낮은 건물이 띄엄띄엄 배치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시 방문해보니 밥은 맛있고 풍경이 좋고 고양이는 귀여운 학교였다. 여행 중에 산책 삼아 다녀오기 딱 좋다.
다시 택시에 타서 소제동으로 향했다. Ktx 대전역 동쪽에 자리한 소제동은 일제강점기에 지은 철도관사촌이 있던 자리다. 이 당시 100개 이상의 관사 중에 현재는 29개의 관사가 남아 있다. 대전에서 낙후된 동네 중 한 곳이었던 소제동이 최근에는 가장 핫한 동네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익선동 도시재생사업의 주인공이었던 익선다다가 소제호로 이름을 바꾸어 이 곳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슈니첼, 파스타, 피자, 샤브샤브, 딤섬 등의 메뉴를 다루는 레스토랑과 디저트 카페 여러 곳이 이 동네에 새로이 만들어졌다. 방문하기 전 조금 우려되었던 부분은, 카카오 지도 내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싸다, 자리가 불편하다, 음식이 맛이 없다 등의 평이 많았다. 그럼에도 막상 도착하니 카페에 앉을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성황이었다.
가장 먼저 방문한 것은 밀푀유 디저트로 유명한 카페 층층층이었다. 외관은 익선동의 식물과 비슷하다. 폴리카보네이트로 감싸 반투명한 벽이 기존의 오래된 건물을 감싸고 있다. 딱 두 사람 앉을자리가 남아 있어 우선 자리를 잡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등받이 있는 의자가 몇 개 보이지 않는다. 디저트와 음료의 값은 보기보다 꽤 비싼 편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서울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맛있는 디저트를 너무 많이 접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편히 쉴 곳은 아닌 것 같아 그대로 나와 다른 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두 번째로 찾아간 집은 도넛이 주메뉴인 베리도넛이라는 카페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활용해 알록달록하게 꾸민 간판이 귀엽다. 내부도 오래된 한옥을 개조해 산뜻하게 꾸몄다. 도넛 하나를 고르고 음료를 주문하려는데, 메뉴가 좀 아쉬웠다. 한눈에 딱 보기에도 엄청나게 달아 보이는 도넛이 주메뉴인데 달지 않은 음료는 전체 일곱 개의 메뉴 중에 단 두 개밖에 없었다. 그나마 두 개 중에 하나는 논커피라 다행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등받이 있는 의자가 대부분이라 다행이었다. 허리를 다친 이후로는 어딜 가든 편한 의자를 제일 먼저 찾게 된다. 우리가 주문한 메뉴는 말차 밀크와 시나몬 밀크, 그리고 바나베리 도넛이다. 바나베리 도넛은 도넛을 반 잘라 안에 딸기잼과 바나나, 커스터드 크림을 채우고 위에 슈가파우더와 딸기를 올린 메뉴다. 시나몬 밀크는 앙증맞은 잔에 나왔다. 도넛의 달달함을 중화시키기에는 많이 아쉬운 양이다. 그래도 편히 쉴 수 있는 카페라 다행이었다. 마주 보고 앉아서 서로 노트북과 키보드를 꺼내 잠시 일하고 글 쓰는 시간을 가졌다.
저녁도 소제동에서 먹을까 하다가 카페가 영 만족스럽지 않아 꺼려졌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돈가스집을 찾았다. 블루부코라는 이름의 돈가스집과 블루부코라는 카페를 나란히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마당에 길게 늘어뜨린 조명이 루프탑 카페를 연상케 한다. 에그 카레와 반반 돈가스를 주문하고 천천히 식사를 즐기다 나왔다.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 두 가지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익선다다이기에 대전에 새로 하는 사업은 어떤 형태일지 기대감이 컸다. 서울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업으로 평가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제동 안에서도 그 생각이 유효했다. 낙후된 동네를 정비하여 다시 사람들이 찾게 만드는 동네로 만든다면, 도시라는 큰 틀에서 보았을 때 좋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제동만을 보러 대전에 갈 만큼 매력이 있지 않아 아쉬웠다. 기존 동네의 매력을 살린 메뉴가 아니라서 더 그렇다.
게다가 소제동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있는 신안동에 가니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이다. 설날 바로 다음 날이라 가장 손님이 많아 소제동은 앉을자리 찾기 힘든 상황인데, 신안동에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은 자리도 넓고 깨끗하고 정비도 잘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게 전체가 텅텅 비어있어 마음이 아팠다. 단순히 그 동네만 부활시켜서 부동산 차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까지 좋은 영향을 미쳐야 ‘도시’ 재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씁쓸한 마음이 한켠에 남았다.
배가 불러 대전터미널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다시 소제동을 거쳐 큰길을 따라 걸었다. 소제동 옆으로 대동천이 흐른다. 청계천처럼 그 주변을 따라 산책하고 운동하는 주민들이 보인다. 둑 위는 으스스한 분위기다. 혼자 여행을 온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한 시간 남짓 걸었다. 어둡던 길은 터미널 근방에 와서야 밝아졌다. 버스 시간까지 사십 분 정도 남아 바로 근처의 코인 노래방을 찾았다. 카이스트 교내에서 가지 못해 아쉬웠나 보다. 20분을 열창하고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오늘의 가계부
서울경부 터미널 > 대전 복합터미널 우등 15,300원
터미널 뚜레쥬르 : 도넛과 차 5,500원
이응노 미술관 입장료 : 인당 500원
이응노 미술관 > 카이스트 택시비 4,500원
카이스트 학식 : 카이마루 4,500원
카이스트 > 소제동 택시비 10,100원
베리도넛 : 바나베리 도넛 5,000원, 시나몬밀크 5,000원, 말차밀크 4,500원
블루카돈 : 반반 돈가스 10,000원, 에그 카레 8,000원
코인 노래방 : 20분 2,000원
대전 복합터미널 > 서울경부 터미널 우등 인당 15,1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