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만 바빠도 여행 떠날 하루쯤은 있겠지 #5
파주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 것은 대학교 시절이었다. 헤이리 마을과 출판도시가 부상하던 시기였고, 한국의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모여 지은 건축물들은 갓 완공되었거나,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유명 건축가들이 모여 마을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햇병아리 건축학도에게는 설레는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교수님의 인솔 아래 동기들과 함께 신이 나서 거리와 건축을 누비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때는 식당가도 변변치 않았고, 방문객이 들러서 놀만한 곳은 ‘딸기가 좋아’ 정도였다. 지금은 폐업했다고 하니, 새삼스레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을 체감했다. 아무튼 도시락을 먹고 건축물 답사를 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니 도무지 놀러 갈 곳으로는 생각이 들지 않아 한동안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두었지만, 종종 인스타그램을 통해 본 파주의 모습은 내 기억과는 또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약 십 년이 흐른 지금에야 다시 가볼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은 지혜의 숲 도서관이다. 친구에게 이것을 말했더니 주말에 가면 사람이 많아 지혜는 없고 사람의 숲만 있다고 해서 오픈시간에 맞춰 일찌감치 방문하기로 했다. 코로나 31번 확진자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주말이었다. 출발 직전까지 갈까말까를 고민하다가 일단 가보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스크를 단단히 챙기고 합정역에서 광역버스에 올라탔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쪽잠을 자거나 책을 볼 틈도 없이 금세 파주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하늘이 어두컴컴했다.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리를 걸으니 마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다. 웬 한옥 뒤편으로 녹이 슨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갈대가 우거진 하천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고, 나무 데크로 만든 다리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노랗게 물든 갈대 사이를 지나니 늦겨울이 아니라 시월의 어느 날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다리 중간에는 ‘김소월 시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현판이 하나 세워져 있다. 진달래꽃을 한글과 영어로 병기한 안내문에는 문학을 사랑하는 시민들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 서정 시인의 문학과 낭만을 공감하기 위해 조성되었다고 적혀 있다. 바이러스와 미세먼지가 함께하는 늦겨울에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되었으니, 기획 의도는 충실히 구현된 셈이다.
구불구불한 다리를 건너 건물 앞에 당도했다. 코팅된 종이에 지혜의 숲이라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나무로 짠 책장으로 채워진 공간이 펼쳐져 있다. 중간에는 섬처럼 조성한 카페와 카페테리아처럼 생긴 공간이 있는데, 그 넓은 자리에 앉은 것은 대여섯 명이 전부다. 많을 것만 같았던 아이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도 없이 고요한 책의 숲 사이를 걷는다. 오히려 책이 너무 많아 그 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읽을 엄두도 나지 않는다.
책장을 따라 걷다 보니 들어왔던 곳이 아닌 다른 출구에 도착했다. 입구를 마주하고 세워둔 안내판에 손 세정제가 있어 바이러스의 존재를 되새기게 한다. 한쪽에는 나무로 만든 파주 출판단지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옆에 출발하기 전에 눈여겨보았던 활판인쇄박물관에 대한 안내 표지가 있어 전화로 문의하니 오전 방문은 끝났고 한 시와 세 시, 다섯 시 중 아무 때나 방문하면 된다고 한다.
다시 걸음을 돌려 북소리 서점으로 들어갔다. 쇼핑이라도 하는 것처럼 책장을 한줄한줄 다 구경하고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헤이리 마을로 가서 점심을 먹고 구경을 한 다음 다시 돌아올 것인지, 그대로 출판단지 쪽에 남아서 하루를 보낼 것인지 찾아보고 따져보고 하니, 차라리 헤이리는 나중에 따로 방문하기로 결정이 났다. 마음이 편해져 근처에서 밥이나 먹자 하고 나왔다.
우산도 없는데 공기는 차고 습해 빗방울이 조금씩 흩날렸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보냈던 하루가 생각나는 날씨다. 비는 오는데 바람도 세서 우산도 소용이 없는 날이었다. 하이네켄 공장 투어를 하면서 찬 맥주까지 들이키니 으슬으슬한 감기기운이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바람을 뚫고 도착한 네덜란드 전통 식당에서 간단한 코스요리를 주문했었는데, 뜨끈한 스프에 온몸이 녹아 흐물거리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출판단지에는 십 년 전과 달리 그래도 식당이 여러 군데 생겨나 있다. 우리가 찾은 곳은 ‘푸켓 테이블’이라는 이름의 태국요리 전문점이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식당이었는데 들어가니 온갖 태국 물건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점원이 마스크를 쓰고 주문을 받았다.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어 똠양꿍을 주문했다. 매콤새콤하니 속을 데워준다. 날씨에 딱 맞는 완벽한 메뉴 선정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갑자기 해가 난다. 당일치기 여행의 날씨 운은 좋은 편이다. 천천히 걸어 지혜의 숲으로 돌아갔다. 활판인쇄박물관을 볼 수 있는 한 시까지는 시간이 아직 남아있어, 조금 더 둘러보기로 했다. 처음에 들어갔던 곳과 다른 길로 들어가려고 보니 건물 옆에 폭이 넓고 높이가 낮은 독특한 계단이 나타났다. 인스타그램에서 많이 봤던 포토스팟이다. 그래도 남들 다 찍는 자리에서 한번 찍어야겠다는 마음에 번갈아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니 그래도 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다시 지혜의 숲을 둘러보니 아까 놓쳤던 3관이 보였다. 장서 수는 1관이나 2관보다 적지만 책 읽을 자리는 가장 맘에 드는 곳이다. 널찍한 공간에 소파가 간격을 두고 넉넉하게 놓여 있다. 거실 소파 같이 세 명은 앉을만한 것도 있고, 1인용 소파도 있다. 3인용 소파에 기대고 앉으니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으니 마치 충전기를 꽂고 누운 핸드폰이 된 기분이다. 급속충전을 마치고 지하에 있는 활판인쇄박물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