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만 바빠도 여행 떠날 하루쯤은 있겠지 #6
박물관에서 관람객을 가장 먼저 맞이해주는 것은 아트숍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까 전화했던 손님이냐고 알아봐주신다. 활판으로 자신이 원하는 문장을 찍어볼 수 있는 체험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 샵을 둘러보니 활자로 만든 도장도 있다. 천상 직장인의 태도로 적당한 친절과 거리감을 두고 보스에 대한 재미난 뒷담화도 섞어가며 설명을 해주시는 직원 분 덕분에 정신을 차려보니 책 한 권과 ‘불변도장’ 하나와 영수증 두 개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불변도장’은 금속활자로 만든 도장이다. 나무나 상아, 플라스틱 등을 깎아 만든 도장과 달리 이미 제작된 활자에서 원하는 글자를 골라내 조합해서 만든다. 정방형의 형태로 네 글자나 여섯 글자, 열 여섯 글자의 조합으로 만들 수 있는데, 원한다면 빈칸을 넣을 수도 있다. 종이에 원하는 글자와 들어갈 형태를 적으니 활자를 직접 찾을 수 있게 안내해 준다. ‘잘 짓는 마닐씨’를 아홉 칸짜리 도장에 넣으려고 선반에서 글자를 하나하나 찾았다. 아트숍에 있는 선반에는 이름에 넣는 글자들이 주로 있어 ‘짓’과 ‘닐’은 안쪽에 있는 박물관에서 찾아다 주셨다. 빈칸까지 채우고 본드로 나무 틀 안에 금속을 고정하고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었다. 선명한 명조체로 찍힌 도장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다.
박물관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구매하거나 입장권 대신에 책을 한 권 구매하면 된다. 케이-픽션이라는 시리즈로 국내 작가들의 단편소설이 영문과 병기된 책 시리즈가 있어, 구병모 작가의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를 골랐다. 금속활자로 만든 도장과 책이라니, 파주 출판도시다운 MD(굿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관람을 시작했다. 활자인쇄박물관의 전신은 총 네 곳이다. 1969년 전주에 설립된 제일활자공장, 1972년 대구에 설립된 봉진인쇄, 1981년에 마찬가지로 대구에 설립된 영선인쇄, 그리고 2011년에 설립된 독창(독서와창작)학교가 통합하여 2016년에 활판인쇄박물관이 개관했다. 이 중 앞의 세 곳은 각기 대한민국 마지막 활자공장, 마지막 활판인쇄소, 그리고 최대 조판 보유 인쇄소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덕분에 20톤, 2만 2천 종, 3천 5백만 자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활자를 보유한 곳이 되었다. (출판도시 활판인쇄박물관 팜플렛 발췌)
시선이 닿는 벽마다 온통 나무 선반에 금속활자로 가득 차 있다. 활판에 활자를 끼워넣는 작업을 ‘식자’라고 한다. 글자를 심는다는 뜻이다. 금속활자에 새겨진 작은 글자 하나하나를 나무라고 생각한다면, 말 그대로 이 곳은 ‘활자의 숲’이다. 지하 공간이라 어두울 줄 알았는데 천정이 유리로 덮여 있어 의외로 밝다. 유리 아래로는 흰 천을 걸어 놓아 직사광선을 피했다. 여우비가 쏟아질 만큼 흐린 날이었지만 해가 구름을 비집고 나올 때마다 따뜻한 빛이 쏟아졌다. 햇빛이 닿은 작은 금속 조각 하나하나가 포근해 보일 지경이다.
기본 활자는 세 가지 사이즈로, 없는 글자 없이 온갖 글자를 다 갖추고 있다. 대부분이 명조체지만 간간히 고딕체도 보인다. 어마어마한 양의 활자는 저마다의 규칙을 가지고 꽂혀 있다. 아트숍에는 이름에 자주 쓰이는 활자들이 꽂혀 있었듯이, 어느 선반에는 어미에 자주 쓰일 법한 글자들이나 제목에 많이 쓸법한 글자들이, 또 어디에는 잘 쓰이지 않는 글자들이 꽂혀 있었다. 신문 한 부를 만들기 위해 이 거대한 활자의 숲에서 일일이 글자를 찾아 조합하여 판에 꽂고 잉크를 묻혀 한장 한장 기계로 찍어내는 것을 상상해보니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박물관에는 활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쇄기와 타자기 등 제책에 관련된 온갖 기계들 또한 가득하다. 봉진인쇄를 그대로 옮겨놓은 전시실은 알비온, 반터쿡, 포코, 대구중공업 등에서 제작한 인쇄기와 제책기가 자리하고 있다. 다른 관람객이 모두 떠나갈 동안 한참을 구경하고 있으니 예의 그 직원 분께서 다시 오셔서 직접 인쇄기를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는 기계를 보고 있자면 평소에 느끼지 못하는 문명에 대한 짜릿함이 밀려온다.
옆 전시실에 가니 사방을 둘러 온갖 색깔과 모양의 타자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타자기도 금속활자로 만들어진 기계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이 전시관의 이름은 ‘가동활자관’으로, 한글 기계화의 과정과 세계 각국의 희귀타자기를 체험하는 교실이라는 붙어 있다. 움직이는 활자라니, 활자의 관점에서 타자기를 부르는 색다른 이름이다.
가동활자관 맞은편으로는 KBS 다큐 <그날이 오면>에서 제작한 보성사 세트장이 있다. 1919년 3·1 독립선언문을 인쇄하고 불태워진 출판사를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이 곳에도 활자와 함께 독립선언문 활판이 전시되어 있다. 해당 다큐는 2019년에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촬영된 것이다.
한참을 구경하고 놀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SNS 이벤트로 진행해서 받은 연필 두 자루와 함께 박물관을 떠났다. 여행은 늘 기대한 곳보다 의외의 곳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는다. 끊임없는 고민과 도전으로 새롭고 멋진 기획을 해내는 분들이 있는 덕분에, 활자의 숲에서 멋진 전시와 기념품과 친절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