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만 바빠도 여행 떠날 하루쯤은 있겠지 #2
서른 살의 시작과 끝을 강릉에서 장식하고 있다. 강릉 방문은 올해만 세 번째다. 첫 번째는 나홀로 서른살맞이를 하러 3박 4일간 머물렀고, 두 번째는 친구들과 함께 넷이서 1박 2일로, 세 번째인 오늘은 룸메이트와 둘이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당일치기 여행으로 온 것이다.
몇 년만에 한 도시를 방문한다면 지난 번에 방문했을 때 좋았던 곳을 위주로 방문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비교적 짧은 간격을 두고 방문하니까 새로운 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룸메이트도 나도 강릉이라는 도시를 꽤 좋아하는 데도 이상하게 발길이 닿지 않던 곳이 있었는데, 바로 테라로사 커피공장이다.
아침 8시에 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원하던 시간대에 있던 버스가 프리미엄 고속버스라 그대로 예약했는데, 덕분에 럭셔리한 기분으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앞뒤 간격이 매우 넓어서 뒷사람에게 민폐 끼칠 걱정 없이 거의 누워서 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또, 핸드폰 무선충전과 usb 충전을 둘 다 지원해서 편리하다.
기차여행과는 다르게 휴게소에 들를 수 있다는 점도 좋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다. 오랜만에 휴게소에 왔으니 클래식한 메뉴인 통감자구이와 트렌디한 메뉴인 소떡소떡을 같이 주문했다. 맛도 맛이지만 여행의 기분을 낸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도착까지 한 시간. 미리 가고 싶은 곳을 찍어놓은 지도를 켜고 어디부터 갈지 결정하기로 했다. 오늘의 계획은 강릉중앙시장 근처의 식당에서 옹심이와 장칼국수를 먹고, 테라로사 커피공장에 갔다가, 카페 이진리도 가고, 마무리는 버드나무 브루어리에서 하는 것이다. 여유 있게 계획을 짜고 빈 곳에 뜻밖의 기쁨을 채워넣는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계획은 설렁설렁하게, 마음은 알차게. 여행 계획의 모토다.
강릉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미리 점찍어둔 옹심이 집으로 향했다. 룸메이트는 옹심이를 딱 한번 먹어봤는데, 덜 익은 듯 퍽퍽해 정말 맛이 없는 음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나에게 옹심이란 강원도에 갔다면 꼭 먹어야 하는 소울푸드 중 하나인데 말이다. 음식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어주는 것이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의 의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의무를 다한다는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식당 문을 열었다.
가게 안은 허름한 편이지만, 문 앞에 놓인 석유난로와 그 위에 올려둔 주전자가 따뜻함을 채워주고 있다. 장칼국수 한 그릇과 옹심이 한 그릇을 주문했다. 옹심이는 조금 아쉬운 맛이었고, 장칼국수가 별미였다. 국물 한 스푼 안에 바다의 맛이 요동친다. 맵지도 않고 딱 적당한 간의 국물이다. 정신없이 국물과 국수를 번갈아 먹다 보니 어느새 바닥이 드러나 있다. 룸메이트는 다행히도 옹심이가 맛있어서 편견이 없어졌다고 한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기분 좋게 식당을 나와 시장을 한 바퀴 구경했다. 몇몇 점포가 유명한지, 딱 봐도 크리스마스를 맞아 강릉에 여행 온 젊은 커플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 길거리 음식도 물론 여행의 재미 중 하나지만, 이제는 식당에 들어가 제대로 먹는 음식이 더 좋다. 사람구경 반, 음식구경 반을 하며 시장을 지나쳐 대로변에서 택시에 올라탔다.
테라로사 커피공장은 테라로사 커피의 본점으로, 강릉 시내에서 약 십 키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택시를 타니 금방이다. 대구와는 달리 택시 기사님들이 과묵한 편이라 좋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진한 커피 냄새다. 과연 커피의 도시라 할 수 있는 향이다. 저 앞에 벽돌과 콘크리트의 조화가 멋들어진 건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작은 도시와도 같은 이 건물은 커피공장을 겸한 뮤지엄과 뮤지엄샵, 레스토랑, 그리고 카페로 이뤄져 있다. 식후 커피가 절실했던 우리는 일단 카페로 향했다. 번호표를 뽑고 자리를 잡고 순서를 기다려 주문대로 향했다. 디저트도 맛있다는 후문을 듣고, 각각 따뜻하고 시원한 라떼 한 잔씩과 초콜릿 바, 크로와상, 그리고 슈톨렌을 주문했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 크리스마스에 슈톨렌을 먹는 문화가 수입되어 유행하기 시작했다. 우리집은 작년에 한번 사먹어보고는 반해서 올해 겨울에도 꼭 먹어보기로 했는데, 테라로사에도 있을 줄은 몰랐다. 어른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셀프로 받는 법이다. 1/4은 바로 먹고 나머지는 포장하고 싶다고 하니, 센스있게 가운데를 잘라 얇게 썰어주고 나머지는 다시 붙여 정성스레 포장해주셨다. 마르지 않게 슈톨렌을 먹는 방법이다.
조금 기다리니 커피가 나왔다. 사실 서울에서도 매번 맛있는 커피를 먹기에 별 기대 없이 한 모금 들이켰는데, 룸메이트와 서로 크게 뜬 눈을 마주했다. 커피를 잘 알지는 못해 표현할 적당할 말을 찾기 어렵지만, 적당한 산미가 고소한 우유와 어우러지는 맛에 아주 행복해졌다.
디저트 한 입에 커피 한 모금. 슈톨렌은 럼에 절인 과일의 맛이 농축되어 있다. 초콜릿 바는 브라우니 위에 견과류를 올리고 초콜릿을 부어 만든 것이다. 초콜릿에 오렌지 제스트를 넣었는지 상콤한 시트러스 향이 섞여 있어 달콤한 브라우니와 궁합이 좋았다. 크로와상은 한입 먹자마자 파리에 온 기분이었다. 겹겹이 쌓인 패스트리가 순식간에 지구 반대편으로 데려다주었다. 커피잔이 비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맛있는 디저트와 커피로 기분을 채우고 나니 공간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건축설계에서 인테리어로 업역을 조금 바꾼 참이다. 어제는 곧 마감인 전쟁같은 현장에서 하루종일 잡부 역할을 했는데, 조명 다는 것을 도왔더니 그 구조와 디테일이 한결 눈에 잘 들어온다. 완성된 결과물을 보는 것과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본격적으로 줄자를 꺼내 실측을 했더니 룸메이트가 여행을 와서도 일을 한다고 아주 재미있어 했다. 각 부분의 사이즈를 재며 스케치를 했더니 금세 종이 반 장이 채워졌다. 건축설계는 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을 때 더 재미있는지 모를 노릇이다. 이래서야 탈건축은 요원한 소원이다.
커피를 다 마시고 카페를 나서는 길에 뮤지엄 샵에 들렀다. 커피와 강릉을 소재로 한 여러가지 상품을 팔고 있다. 강릉의 자연을 모티프로 한 머그컵과 밀크컵이 귀엽다. 커피나무를 화분 째로 파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생두를 자루로 쟀을 때 썼을 법한 커다란 저울을 이용한 디스플레이가 눈에 띄었다. 레트로 디자인과 업사이클링을 두루 다루고 있다.
멀어서 오기 망설여졌던 테라로사 커피공장이었지만, 한번 방문해보니 왜 다들 찾아오는지 이해가 갔다. 무엇 하나 빼어나지 않는 것이 없는 곳이다. 찾아보니 테라로사 커피공장의 대표는 경쟁자를 다른 카페가 아니라 현대카드와 루이비통으로 생각한다는 인터뷰가 있었다. 과연, 커피 뿐 아니라 브랜딩과 공간 디자인, 디저트까지 모두 엄지를 치켜들게 만드는 사람은 남다른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버드나무 브루어리다. 다소 이른 시간이지만, 더 많은 사람이 몰리기 전에 일찌감치 찾아가기로 했다. 사람이 몰리는 시기에 여행을 가더라도 피크타임만 피하면 비교적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테라로사는 우리가 막 도착했을 때 한산하더니, 떠날 때가 되었을 때는 그 넓은 공간에 빈 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강릉 사람들은 다 테라로사에 가 있는 줄 알았다.
브루어리에 도착했을 때에도 다행히 한산했다. 강릉남대천을 낀 도로변에 위치한 이 곳은 오래된 공장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보인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심겨져 있는 작은 마당을 지나 들어가니 널찍한 실내 공간이 나왔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창가 밖으로 오래된 디자인의 방범창살이 보이고, 유리 한 장 너머에는 맥주 숙성통이 놓여 있다.
메뉴판을 들춰보니 맥주의 이름이 재미나다. 대부분 순한글에서 이름을 따 왔고, 몇 개 이름은 강릉말이다. 저무는 마을이라는 뜻의 ‘즈므마을’에서 이름을 딴 <즈므블랑>도 있고, 대관령의 강릉말을 딴 <대굴령 페일에일>도 있다. 하필 맥주 주문만 가능한 브레이크에 도착한 터라, 맥주 두 잔을 먼저 주문했다. 쌀을 첨가해서 바디감이 가볍다는 체리 세션과 바나나향이 난다는 호피한 호피 세종이다.
맥주를 마시며 가볍게 수다를 떨다가, 글을 쓰다가 보니 금세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브레이크가 끝나 직원이 와서 식사 주문을 추가할지 묻는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메뉴로, 홈커밍 베이컨 스테이크와 맥 라자냐를 주문했다.
맥주보다는 음식이 인상적인 곳이다. 맥 라자냐는 맥앤치즈에 볼로네제를 더해 그라탕처럼 만든 메뉴로, 여기에 짭쪼롬한 베이컨 스테이크를 얹어 먹으니 꿀맛이었다. 스테이크에는 바삭하니 포슬한 감자튀김과 샐러리 피클이 곁들여 나왔다. 상큼한 샐러리를 피클로 만드니 그 자체로도 너무 맛있고 모든 메뉴의 입가심이 되어 좋았다.
기분 좋게 배부른 상태로 택시를 타고 마지막 장소로 향했다. 내게는 한국에서 가장 독보적으로 이색적인 커피 맛을 보여준 카페 이진리다. 올해 두 번째 강릉 여행에 들르고 너무 마음에 들어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이진리는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카페다. 초등학교 시절에나 보았던 풍금이 구석에 놓여 있고 벽에는 옛날 보일러의 컨트롤러가 그대로 달려 있다. 레트로 감성의 끝판왕을 달리는 곳이다. 자리를 잡고 ‘결제를 바랍니다’ 파일을 펼치니 메뉴판이 나온다. 이 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이진리 커피와 시나몬 슈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이진리 커피는 노란 커스터드 크림과 커피의 조합에 시나몬으로 마무리한 독특한 메뉴다.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먹어봐야 아는 맛이다. 시나몬 슈가 아메리카노는 동남아의 커피를 모티프로 만든 달콤한 커피다. 따뜻하면 쌍화차와 비슷하고 차가우면 수정과와 비슷하다고 해서 아이스로 주문했다.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독특한 풍미가 입안 가득히 퍼진다.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정말로 하루가 마무리되는 기분이다. 말 없이 편안히 쉬다가 나왔다. 고속버스터미널까지는 도보로 삼십분 거리라 소화도 시킬 겸 걸어가기로 했다. 거리에 트렌디한 컨셉의 카페와 쇼룸이 몇 군데 보인다. 다음에 여행 오면 새로운 곳을 방문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시원한 바람은 겨울보다는 가을에 가깝다. 걷기 딱 좋은 날씨다. 길가는 고양이에게 인사하니 냉큼 다가와 머리를 비벼댄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걸 보니 주민들이 잘 돌보아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한참을 쪼그려 앉아 머리며 엉덩이며 쓰다듬어 주었다. 아직은 거리의 털뭉치들이 춥지 않은 계절이라 다행이다. 귀여운 고양이 친구까지 생겼으니 완벽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저녁이다.
*오늘의 가계부 - 1인당 약 12만원
프리미엄 고속버스 : 서울-강릉 왕복 1인 47400원
횡성휴게소 : 통감자구이 2000원, 소떡소떡 3500원
강릉 고속버스터미널-중앙시장 택시 3900원
여왕개미식당 : 장칼국수 6000원, 옹심이 7000원
중앙시장-테라로사 커피공장 택시 10700원
테라로사 커피공장 : 카페라떼 5500원, 슈톨렌 20000원, 초콜릿바 3000원, 크루아상 3000원, 원두 250g 13000원
테라로사 커피공장-버드나무 브루어리 택시 8400원
버드나무 브루어리 : 체리 세션, 호피 세종 각각 400ml 6000원, 홈커밍 베이컨 스테이크 20000원, 맥 라자냐 12000원
버드나무 브루어리-카페 이진리 택시 4100원
카페 이진리 : 이진리 커피 6000원, 시나몬 슈가 아메리카노 4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