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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Feb 18. 2024

시드니의 북쪽 곶과 남쪽 곶

그리고 기깔나는 신라면을 먹다

엄마는 성당에 보내고 혼자 카페 즐기기


사람 간의 관계가 좋으려면 늘 적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말이다. 오늘은 일요일. 엄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 일요일에는 성당에 가고 싶다고 하여, 아침부터 엄마를 성당에 보내놓고 오롯이 혼자만의 카페 타임을 즐길 계획을 짰다.


아침은 또 요거트와 오픈 샌드위치.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나가야 하루가 힘차다는 것이 우리 집의 가훈 아닌 가훈이다. 오늘의 요거트용 과일은 천도복숭아와 망고, 샌드위치 재료는 새로 산 살라미와 차이브가 들어간 치즈, 상추, 천도복숭아와 망고다. 도시락은 같은 샌드위치에 뚜껑만 덮었다. 어제 산 포도가 아주 달고 맛있어서, 자두와 함께 간식으로 챙겼다. 도시락은 내가 들고 가기로 하고 끝까지 같이 가자며 입을 삐쭉거리는 엄마를 내보냈다. 좀 더 누워서 빈둥거리며 놀까 했는데 생각보다 카페를 즐길 시간이 짧을 것 같아 얼른 숙소를 나섰다.



정작 거리로 나오니 어떤 카페를 가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구글에 ‘Best Cafes in Sydney’라고 검색하니 지도가 나왔는데, 대부분은 일요일이라고 닫혀 있었다. 주말에는 많은 카페가 쉬나 보다. 하이드 파크 근처에 있는 카페 하나가 연 것을 확인하고 출발했다. 우리나라는 공원을 마주하고 카페가 아주 많은데, 여기는 한 블럭 뒤에 카페가 많다. 기대했던 공원 뷰 카페는 아니지만, 방문한 곳도 제법 멋졌다.


카페는 백화점 1층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에 위치해 있었는데, 벽면에 목재로 멋진 곡선을 장식해놓았다. 디카페인 플랫화이트 한 잔을 시켰는데, 주말이라서 한 번, 매장에서 마신다고 또 한 번 값이 붙었다. 그래도 한화로 약 5500원 정도니 서울 커피값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아이스로 주문하는 걸 깜박했더니 카푸치노 같은 커피가 나왔다. 우유 커품이 크리미한 게 아주 별미다. 커피 맛도 좋다. 내내 앉아서 커피 한 모금 한 모금을 소중히 마셨다. 한 시간의 꿀같은 시간이었다.



성당은 카페에서 하이드 파크를 가로질러 반대편에 있다. 땡볕에 조금 더웠지만 날씨가 좋아 기분도 덩달아 좋았다. 미사 시간에는 관광객들을 들이지 않아, 미사를 올리려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 성당을 보려고 줄 선 관광객들 옆 그늘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인 열한 시 반에 맞춰 나온 엄마는 꽤 즐거워 보였다. 세인트 메리 성당은 주교좌 성당(Cathedral)인데, 10시 반 미사가 대미사라 주교님이 직접 미사를 집전하셨다고 한다. 9시 미사를 갔으면 성대한 미사는 못 봤을 거라며 잘 갔다고 좋아하신다.




마이너 취향이 불러온 절경


일정을 서두른 이유는 따로 있다. 시드니는 주말에 교통편이 저렴한 편이다. 주말이라 하면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을 말한다. 즉, 오늘 최대한 교외지역을 많이 나가야 경비를 아낄 수 있다. 첫 목적지는 노스 헤드(North Head)다. 왓슨즈 베이(Watsons Bay)가 좀 더 유명한데, 구글 맵에서 찾아봤을 땐 노스 헤드에 더 독특한 경관이 있어 무조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스헤드는 오페라하우스 옆 서큘러 퀘이(Circular Quay)에서 맨리(Manly) 방향으로 가는 페리를 타면 된다. 페리는 15분마다 오지만 맨리 항에서 노스헤드까지 가는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 뿐이고 버스가 일찍 끊기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 연착되었는지 12시 배를 타러 갔더니 바로 전 배가 떠난 참이었다. 결국 배는 12시 15분에 출발했다.


페리를 타서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배 측면의 바깥 자리에 앉았는데, 세상에 명당도 이런 명당이 없다. 항구를 나온 배가 U턴을 하더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와 중심지구를 보여주었다. 바람은 어마무시하게 불었지만 멋진 풍경에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엄마는 또다시 “특등석이네 특등석!”을 외쳤다. 서큘러 퀘이에서 배를 탈 때 배 진행 방향의 오른쪽에 타면 끝내주는 뷰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배는 앞머리를 부두에 대니 참고하여 방향감각을 잘 살려보기 바란다.



페리는 20분 만에 맨리 항(Manly Wharf)에 도착했다. 다음 버스는 12시 42분에 있어 서둘러야 한다. 구글 지도에서 말하는 161번 버스 정류장은 역 바로 앞인데, 거기엔 도착지가 제대로 써 있지 않았다. 좌측통행이니 길을 건너서 타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건너편 정류장에 가니 다른 버스 기사님이 역 바로 앞에서 타라는 것이다. 거기서 빙 돌아서 노스 헤드 방향으로 갈 거란다. 결국 역 앞 관광안내소에서 다시 물어본 후에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정류소 위치를 찾아(역 앞에서 타는 게 맞았다) 들어오는 버스를 바로 탈 수 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생경한 풍경이 펼쳐진다. 검은 나무가 사방에 삐죽삐죽 솟아 있고 아래로 새로 난 나무 덤불이 무성하다. 노스 헤드를 둘러싼 페어팍스 트랙(Fairfax Track)을 돌기로 했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1km짜리 코스다. 동쪽과 서쪽에 각각 전망대(Yiningma Lookout, Burragula Lookout)도 있다. 우리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걸어 서쪽 전망대를 먼저 보고 동쪽 전망대로 갔다. 서쪽 전망대에서는 시드니 시내가, 동쪽 전망대에서는 층암 절벽 구조를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절경이다. 산책 코스도 전망대도 모두 멋지게 디자인되어 있다.


걷다 보니 군데군데 우유곽 만한 종이 틀 네 귀퉁이를 대나무로 보강하고 새로 나무나 풀을 심어놓은 것도 많다. 이 풍경의 정체가 궁금해질 무렵, 동쪽 전망대에서 귀인을 만났다. 이 지역은 시드니 하버 국립공원에 속하는데, 국립공원 관리인 중에서도 수다쟁이를 만난 것이다. 우리가 먼저 인사를 건네고 어째서 나무들이 검은지 묻자, 2019년에 있었던 화재로 나무들이 다 타버려서 지금과 같은 풍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원래 군사지역이었으나 1990년대에 철수한 곳이다. 군사지역일 때에는 황무지였는데 군인들이 이 땅을 떠나자 바람을 타고 온 식물 씨앗들이 잎을 틔워 자연스레 수풀이 조성되었다. 무성해진 수풀은 화재로 타버렸으나 나무가 타면서 씨앗을 뿌리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풀과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서 인간이 우유곽 사이즈 종이 안에 씨앗을 심어 거친 자연환경에서 잘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호주에서는 많이 쓰이는 식재 방식이라고 했다. 종이도 대나무도 생분해가 되니 좋지만, 뿌리를 내린 식물이 조금 더 자라고 나면 종이곽을 철거할 예정이라고 한다. 화재 이후 5년 만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산책로와 전망대 또한 작년 5월 즈음 공사가 완료되어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라 한다.


짧은 산책이었지만 호주다운 모습을 볼 수 있어 정말이지 매력적인 장소였다. 무엇보다 자연이 이뤄내는 회복탄력성에 감탄이 나왔고, 탄 나무를 그대로 두고 새로운 수풀이 자라도록 두는 인간의 인내심과 믿음이 좋았다. 거기에 조금만 손을 대어 씨앗부터 키워내는 풀과 나무도 좋았다. 주말에 시간을 내어 방문하기에 하나도 아깝지 않은 장소였다.





북쪽 곶을 봤다면 남쪽 곶을 봐야지


다시 버스를 타고 맨리 항으로 돌아갔다. 맨리 항에서 노스 헤드까지 걸어가는 코스도 있지만 체력 상 페어팍스 트랙만 돌았는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일찍 돌아온 덕분에 왓슨즈 베이까지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맨리에서 왓슨즈 베이까지는 물리적으로는 그다지 멀지 않다. 시드니 한가운데를 파고드는 파라마타 강과 동쪽의 거대한 태즈먼 해가 만나는 끄트머리의 북쪽 반도가 맨리이고, 남쪽 반도가 왓슨즈 베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왓슨즈 베이의 북쪽 끄트머리 이름이 사우스 헤드(South Head)다.


북쪽 곶을 보고 왔다면 남쪽 곶도 봐줘야 인지상정이다. 맨리 항에서 왓슨즈 베이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곧장 가는 페리를 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서큘러 퀘이까지 다시 가서 배를 갈아타고 가는 것이다. 후자가 좀 더 번거롭지만 대신 페리의 운항 간격이 짧고 주말 할인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전자는 사설 페리 업체를 이용해야하기 때문에 약 10달러의 운임을 따로 내야 한다. 우리는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서큘러 퀘이까지 다시 20분, 서큘러 퀘이에서 페리를 타고 다시 30분을 가서 왓슨즈 베이에 도착했다. 운이 좋아 페리를 거의 기다리지 않고 탈 수 있었다.



왓슨즈 베이 선착장 앞에는 해수욕장이 있다.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 번호에 맞춰 줄지어 세워놓은 페들보트들, 그리고 바로 근방까지 들어오는 페리와 요트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배가 다니는 곳에 사람들이 있어도 되나, 싶지만 둘 사이를 가로막는 아주 가벼운 형태의 구조물이 있고 배가 다닌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물이 맑아 괜찮은 것 같다. 배에서 내려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미역이 산들거리는 것이 다 보일 정도로 맑았다.



강행군 나흘 째라 둘 다 지쳐서 사우스 헤드 트래킹을 시작하기도 전에 부둣가의 레스토랑에 앉아 호주에서의 첫 피시앤칩스를 먹어보기로 했다. 호주 가이드북에도 나온 도일스를 찾았는데, 갓 나온 피시앤칩스를 딱 한 입 먹자마자 동태전이 생각났다. 이렇게 외국에 나와서 한식이 생각나는 것은 모두 한식이 지나치게 맛있기 때문일 것이다. 3만 5천원짜리 감자튀김과 동태전을 먹고 나서 어쩐지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제사를 지낸 다음 전을 넣어 끓어먹던 김치찌개가 생각났기 때문일까… 그래도 라이브 음악을 들려주는 가수도 있고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섰다. 노스 헤드보다는 좀 더 투박한 곳이었다. 옛 성벽과 대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저 멀리 건너편의 노스 헤드가 보였다. 전반적인 산책길의 분위기는 우리나라 산의 둘레길과 비슷했다. 비도 한 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해서 결국 중턱 즈음 걸음을 돌려 내려왔다. 둘 다 휴식이 필요한 타이밍이다. 페리 선착장에 도착하여 10분쯤 기다리자 배가 들어왔다.




오, 신라면


68일 간의 유럽 여행에서도 먹은 적 없는 한국 라면을 시드니 도착 나흘 만에 먹게 될 줄은 몰랐다. 이건 다 동태전, 아니 피시앤칩스 때문이다. 엄마한테 국물이 먹고 싶다고 해서 마트에 같이 갔다가 신라면 5개 들이 한 봉지와 계란 12개짜리 한 팩, 그리고 우유를 사왔다. 오늘 저녁은 아주 불량하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엄마한테 짐을 맡기고 바로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맡는 라면 냄새에 아주 행복해진다. 시드니는 진순이(진라면 순한 맛) 파였던 나에게 신라면을 먹게 만들었다. 노른자만 반숙이 되도록 하고 흰자는 풀어서 끓이는 게 내 방식이다. 각자 라면 한 그릇씩 뚝딱 먹고서 어제 사 온 팀탐 한 팩을 풀어 우유와 함께 먹었다. 역시 식사는 단짠의 조화가 중요하다. 당까지 채웠으니 오늘 밤에는 아주 숙면할 예정이다. 내일의 하루는 일찍 시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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