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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Feb 17. 2024

기암절벽 사이에서 해수욕을

그 유명한 본다이 해변 말고

기암절벽 사이에서 해수욕을


시드니에서 가장 기대했던 날이 다가왔다. 바로 해수욕과 트래킹을 하는 날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수영장은 역시 본다이 해변의 아이스버그 스위밍 클럽이겠지만, 물론 거기도 갈 예정이지만, 가장 기대하는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다. 무계획과 계획이 섞여 있는 나의 여행 스타일이란, 일단 구글 지도를 켜서 확대와 축소를 반복하는 데서 출발한다. 여행책을 들여다보면 기본 정보를 숙지하는 데는 좋지만 아무래도 그건 좁은 지면 안에서 정보를 취사선택하여 보여주기 마련이다. 구글 지도에서는 실제로 세계인들이 많이 찾는 곳과 그 나라에서 관리하는 보호구역 등이 표기된다. 그래서 바로 내가 찾은 곳, 그곳은 본다이에서 남쪽으로 약 8km 떨어져 있는 마혼 풀(Mahon Pool)이다.


어제 2만 보 이상을 걸은 덕분에 엄마는 불면증을 이겨내고 통잠을 자는 데 성공했다. 거기엔 내가 엄마를 위해 챙겨온 안대와 귀가 덜 아픈 수면용 귀마개도 한 몫 했겠지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진짜 못 자면 계속 걸을거라고 했더니 엄마가 살짝 흘겨봤다. 아침부터 둘 다 컨디션이 좋다. 아침 여덟시 반까지 늦잠을 잤으니 더 좋을 수밖에. 식사로 망고와 사과를 넣은 그릭요거트와 미니 오픈샌드위치를 먹고 도시락으로는 샌드위치를 쌌다. 아보카도와 살라미, 치즈를 듬뿍듬뿍 넣은 메뉴다.



식사 정리를 마치고 베낭을 메고 나왔다. 수영복과 도시락, 수건, 비누 등 짐이 많았기 때문이다. 걸어서 버스정류장까지 8분, 버스 타고 30분, 그리고 다시 걸어서 8분쯤 가면 마혼 풀에 도착한다. 시드니에 도착한 이래로 날씨가 가장 화창하다. 날씨가 좋은 토요일이니 동네 사람들도 다같이 놀러 나왔다. 버스를 타고 가며 보는 모든 잔디밭마다 스포츠를 즐기러 나온 사람이 가득이다. 생활체육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천국 같은 나라다. 버스에도 수영복만 입고 서핑보드를 챙겨든 사람들이 제법 많이 탔다. 서퍼들과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다.



마혼 풀은 마러브라 비치(Maroubra Beach) 바로 위에 있다. 멀리서 보기에도 파도가 제법 높아 서퍼들이 바다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포르투갈에서 서핑을 하다가 종아리에 쥐가 심하게 나서 몇 주를 고생한 경험이 있어 서핑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었지만, 그걸 즐기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해변을 따라 걸어가다보니 저쪽에 건물 하나가 보인다. 마혼 풀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샤워실, 화장실 역할을 하는 곳이다. 거기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기암절벽 사이에 있는 수영장이 하나 보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수영장의 모습은 아니다. 흰 타일과 파란 타일이 교대로 깔려 있어 레인이 있는 그런 수영장 말이다. 오랜 시간 퇴적을 이룬 후 다시 침식이 이루어져 거칠게 줄무늬가 나 있는 바위들이 겹겹이 쌓여 생긴 지형 사이에 인간이 콘크리트를 살포시 더해 수영장의 형태로 바꾼 것이다. 감태를 닮은 물이끼가 사방에 끼어 있는데 더럽다기보다는 깨끗하고 부드럽고 폭신하며 미끄럽다. 사람들은 수영장을 둘러싸고 비치타올을 깔고 살을 태우거나 수영장 안에 들어가 수영모도 물안경도 없이 자유로운 수영을 즐기고 있다. 어린 아이들은 채집통을 들고 작은 물고기와 소라를 채집하다가 놓아주기를 반복한다. 수영장 주변의 절리를 따라 걷다가 파도가 치는 곳에서 엄마와 번갈아가며 수영복 입은 인생샷을 찍어주었다. 머리도 포즈도 엉망이지만 아무튼 찍는다는 행위 자체가 즐거운 경험 말이다. 엄마는 수영장에서 몇 번 어푸어푸하며 수영을 즐기더니 “여기서 일주일 동안 살면서 놀아도 좋겠다” 한다. 엄마식 극찬이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당


수영장에서 도시락을 꺼내먹고 나니 어쩐지 수영은 다 한 기분이 들었다. 얼렁뚱땅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해변에는 어차피 수영복만 입고 다니는 사람 천지다. 수영복 위에 반바지와 얇은 바람막이 하나만 입고 트래킹 코스로 향했다. 트래킹 코스도 마찬가지로 구글 지도에서 찾은 기가 막힌 곳이었다. 본다이 해변과 쿠지 해변을 잇는 코스(Bondi to Coogee Walk)인데, 그 사이에 있는 공동묘지(Waverly Cemetery)가 장관이다.


멀지는 않지만 체력을 아끼기 위해 버스를 타고 마혼 풀에서 트래킹 코스의 시작인 쿠지 해변까지 가기로 했다. 주말의 소비 생활을 촉진하기 위해서인지 시드니는 주말 교통비가 평일보다 저렴하다고 한다. 정확한 시스템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튼 할인가로 버스 한 번에 한화로 대략 2000원 가량을 지불했다. 쿠지 해변에도 서퍼들이 가득이다. 수영을 하고 났더니 밥을 먹었는데도 허기가 져서 카페에서 설탕이 잔뜩 묻은 시나몬 롤 하나를 사서 가면서 한 입씩 먹었다. 역시 꿀맛이다. 트래킹 코스를 찾아 걸어가려는데 표지판 하나가 눈에 띈다. ‘브론테-쿠지 아쿠아틱 리저브(Bronte-Coogee Aquatic Reserve)’라고 써있다. 바로 옆에는 그 지역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해양생물에 대한 표지판이 있다. 우리나라로는 해양보호구역의 개념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자연보호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 호주의 자연환경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래킹 코스는 해변가와 공원 산책로, 주택가를 지나가며 조성되어 있다. 그래서 내내 땡볕에서 걷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나무그늘을 즐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쿠지 해변에서 3km 정도를 걷고 나니 눈 앞에 장관이 펼쳐졌다. 물론 오는 길 눈에 닿는 곳 하나하나가 다 아름다웠지만 이건 또 다른 경치다. 거대한 공동묘지가 양지 바른 절벽 꼭대기에 펼쳐져 있고 묘지와 기암절벽 사이로 트래킹 코스가 조성되어 있었다. 절벽 아래로는 널찍한 침대처럼 판판한 바위 위로 쉴새없이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거센 파도가 드나든다. 어찌나 양지바르고 아름다운 땅인지, 내가 죽는다면 화장하고 난 재를 구슬로 만들어 저 사이에 하나라도 묻어주면 죽어서도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트래킹 코스는 총 길이 6km에 부지런히 걸으면 2시간 안에 완주한다는데 베낭도 무겁고 어제 2만 보 걸은 발걸음도 무겁고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모든 풍경이 아름다워 4km도 채 가지 못했는데 한 시간 반이나 흘러버렸다. 결국 남은 거리는 또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엄마도 슬슬 배가 고프다고 하고, 나도 출출해진 참이다. 마지막 목적지는 본다이 해변이다. 그 유명한 수영장은 사진만 찍고 피시앤칩스든 뭐든 저녁거리가 될 만한 걸 먹기로 했다. 본다이 해변의 수영장은 역시 멋지긴 했지만 우리가 방문한 마혼 풀이 최고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유명한 본다이


본다이 해변가에는 우리나라 해변가처럼 상가들이 줄지어 있다. 수영복을 파는 곳, 해산물을 파는 곳, 음식점과 카페가 많다. 피시앤칩스를 먹을까 하여 찾아보다가 평이 좋은 식당을 하나 찾았다. 피시앤칩스보다는 생선덮밥에 가까워보이는 ‘피시 볼(Fish Bowl)’이라는 식당이다. 현미밥에 토핑종류를 골라 주문했는데 역시 좋은 선택지였다. 엄마는 말버릇처럼 “외국에 나가서 왜 굳이 한식을 먹어. 그냥 그 나라 음식을 먹으면 되지.” 라고 했는데 그래도 밥과 젓가락질이 그립긴 했나 보다. 현미밥 위에 연어, 해초, 콩, 샐러리 등이 올라간 포케 비슷한 게 나왔다. 제법 맛있어서 한국에서도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도 둘이 합쳐서 3만원, 서울 물가와 비슷한 식사였다.


식사를 마친 후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엄마랑 사이 좋게 번갈아가며 졸다 깨기를 반복했다. 평소에 다니지 않던 길에서 내렸더니 편의점이 잔뜩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탕, 껌, 샌드위치 등이 한국의 두 배 가격이라 선뜻 손이 가진 않았다. 결국 숙소 근처 맨날 가던 그 쇼핑센터에서 장을 보고 옆에 리쿼샵에서 맥주를 샀다. 일찍 들어왔으니 맥주 한 잔 하면서 쉬어야지. 돌아와 씻고 나와서 잠깐 침대에 누웠더니 몸이 무겁다. 그래도 맥주를 사왔으니, 하고 일어나 블랙사파이어 포도를 씻고 과자를 뜯고 맥주를 땄다. 엄마는 드래프트 유알콜 맥주, 나는 0.5% 미만의 알코올이 들어있다는 아무튼 무알콜 맥주. 합의점 없고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고, 오늘 하루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아빠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하다가 엄마를 먼저 들여보내고 여행기를 쓰고 있다. 어제도 밤늦게 들어와서 여행기까지 쓰고 들어갔더니 엄마가 아빠랑 통화하다가 쟨 누굴 닮아서 하루종일 걷고 들어와서 피곤할텐데 저러고 있냐, 아무튼 날 닮은 건 아닌 것 같다, 하며 서로의 공으로 돌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억이 휘발되는 게 빠른 여행가라 그렇습니다. 즐거운 일은 내일도 또 생길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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