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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Jul 03. 2024

이건 러닝이 아니라 트레일 러닝이지

남해바래길 걷고 달리기

어제 장거리를 운전해서 피곤했던 모양인지, 열 시 반에 기절하듯이 잠들어서 여섯 시 반에 눈이 번쩍 떠졌다. 7월 한 달 내내 장마라는데, 비가 안 오는 아침을 낭비할 수야 없는 법이다. 잠시 누워서 몸이 조금 더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슬슬 일어나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최근에 절친 덕분에 다시 달리기에 재미를 붙인 참이다. 몇 년 전 유럽여행 이후 허리 부상으로 러닝을 그만두었는데, 꾸준히 치료를 받아 회복된 데다 테이핑 하는 정확한 방법을 알게 되면서 부상에 대한 걱정이 줄었다.


남해가 가진 가장 큰 자원은 바로 자연환경인데, 동해나 서해와는 다른 매력의 바다와 산이 이 섬을 이루고 있다. 남해에 오래 산 이들도 아침에 문을 열고 나와 보이는 풍경에 기뻐하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할 정도다. 이 자원을 가장 잘 활용한 것이 ‘남해바래길’이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둘러볼 수 있는 길을 240km의 코스로 엮었다. 팜프라촌에서 가장 가까운 바래길은 숙소에서 걸어서 단 3분 거리에 있다. 오늘은 바로 구운몽길이라는 별명을 가진 남해바래길 9코스의 일부 구간을 달려보기로 했다.


달리기 전에 준비운동은 필수다. 아침에 몸이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서울에서 가져온 요가매트를 숙소 바닥에 깔고 3분간 플랭크를 하며 가볍게 땀을 냈다. 그리고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 금산은 머리에 구름을 잔뜩이고 있다. 공기의 습도가 눈으로 보일 정도다. 아직 풀처럼 보이는 벼는 이 습기가 반가운지 아주 파릇파릇하다. 그래도 비는 오지 않으니 감사하다. 도롯가 가드레일에 대고 발목과 골반을 스트레칭한 후, 걸어서 바래길 코스까지 이동했다.




런데이와 애플워치 어플을 이용해 달리기 모드를 시작했다. 두모마을에서 소량마을과 대량마을 방향, 동쪽으로 2.5km를 달렸다가 다시 2.5km를 달려 돌아오기로 했다. 그런데 아뿔싸, 달린 지 1km도 되지 않아 엄청나게 가파른 마을 안 길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운동화가 미끄러질 정도의 경사길이다. 초반에는 용기를 내서 달려 올라갔는데, 곧장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결국 도로를 만날 때까지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언덕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안개 낀 도로는 끝도 없이 오르막으로 이어졌고, 심지어는 도로에 10%라고 쓰인 표지판까지 있었다. 잠깐동안의 평지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긴 오르막은 ‘오지방고개’를 만나며 내리막으로 바뀌었다. 내리막은 무릎 환자에게 오르막보다도 무서운 존재다. 최대한 보폭을 줄여 종종걸음으로 내려갔다.


그래도 경관 하나는 정말 좋았다. 언덕으로 올라가니 방금 지나쳐온 마을이 바다를 끼고 있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어차피 땀은 나게 되어 있으니 습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속에서 숨 쉬는 기분으로 숨을 헐떡였지만, 동시에 시원한 새벽 공기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바래길을 따라 달리기를 할 생각이라고 하니 팜프라촌 식구들이 “트레일 러닝을 원한다면야…”라고 반응했는데, 그 반응이 이해되는 아침이었다. 매일 자전거로 오르던 관악산 정도는 남해에 비하면 아주 귀여운 언덕이었던 것이다.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무서웠던 마을 안길 구간을 지나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다. 원래는 5km 거리를 7분 정도 페이스로 뛰었는데, 오늘은 km당 9분이 넘게 걸렸다. 언덕이 많았던 것에 비하면 아주 양호한 수준이다. 보일러를 틀고 들어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새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지역에 있으면 아무래도 내내 운전을 하니 몸이 근질근질한데, 이렇게 일부러라도 몸을 움직여주면 하루종일 기분이 상쾌하다. 엄마가 챙겨준 두유 한 팩을 마시고, 샤워하며 가볍게 손세탁한 운동복을 세탁기에 탈수로 돌리고 나왔다. 그리고 팜프라촌 라운지에 나와 노트북으로 첫날 일기를 업로드했다.



하루를 일찍 시작했더니 아직도 오전이 끝나지 않았다. 여행기를 업로드한 후 시간이 남아 책까지 읽었다. 일본의 학자가 쓴 <관계인구의 사회학 : 인구감소 시대의 지역재생>으로, 연구 주제와 관련된 책이다. 내가 관계인구라는 단어에 대해 고민했던 내용들이 거의 다 다뤄지고 있어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는데, 아무래도 연구자가 쓴 글이다 보니 읽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있다. 포스트잇도 점점 빼곡하게 붙이게 된다. 이렇게 빼곡하게 붙인 이상, 결국 한 권 소장하게 될 것 같다.


팜프라촌에서의 점심은 시간이 맞는 사람끼리 함께하고, 시간이 되는 사람이 차린다. 정해진 역할은 없다. 엄마가 챙겨준 된장과 고추장으로 찌개를 끓여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식사당번을 자처했다. 옆방 건우님과 함께 재료를 다듬고 끓였다. 알고 보니 나와 띠동갑인 건우님은 군대를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주 점잖고 재주가 많은 친구다. 덕분에 혼자서는 내지 않았던 육수도 내고, 감칠맛을 끌어올리기 위해 소금과 후추도 넣고, 고명으로 대파와 고추까지 얹어서 냈다. 된장찌개에는 지황님의 어머니가 보내준 제주산 돼지고기를 넣었는데, 비건을 지향하는 유정님을 위해 냄비 하나에는 고기를 넣지 않았다. 어머니의 사랑이 담겨 있어서 그런지 고기는 황송할 정도로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 목공작업실인 팜프라웍스에서 일하는 건우님을 따라가 공간을 구경했다. 목공소에서 나는 톱밥 냄새가 정겹다. 각종 도구들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어 보는 사람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공간이었다. 한쪽에는 우드카빙 재료들이 있었는데, 여기를 떠나기 전에 한 번쯤 수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테이블 쏘 등의 도구를 다루는 목공은 시카고 교환학생 시절 아마추어 수준으로 해본 적은 있지만, 커다란 소음과 부상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기계 없이 손으로 하는 작업은 조금 더 마음이 간다.



목공소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있는 생명체들에 눈이 갔다. 사실 첫날 숙소에 방을 안내받을 때도 보았지만, 이곳에는 쪼끄만 게가 많이 돌아다닌다. 도로에는 자동차 바퀴에 깔려 납작해진 게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띌 정도다. 크기는 손톱보다 작을 정도로 쪼그만 녀석부터 손바닥보다 조금 작을 정도로 큰 녀석까지 있다.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야 따라갈 수 있지만 손으론 못 따를 정도다.

또 청개구리도 있다. 자동차 문콕 방지를 위해 붙여둔 파란색 스티로폼 조각 위에 올라가 있는 걸 보았다. 무섭지도 않은 게, 손톱만큼 작다. 저 조그만 놈이 어떻게 올라갔나 궁금했는데, 스티로폼 옆을 치니 아주 폴짝 뛰어서 바닥까지 내려간다. 점프력이 엄청 좋았나 보다. 이 청개구리는 팜프라촌 라운지 창문에도 몇 마리가 붙어 있었다.

그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벼에 붙은 빨간색 알이다. 이건 대체 무슨 알인지 모르겠다. 다음에 만나는 동네 어르신께 한번 여쭤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알이면 뭔가 보호를 위해 눈에 띄지 않는 색이어야 할 것 같은데, 거의 핫핑크에 가까울 정도로 색이 튄다. 벼에는 해가 가지 않는 곤충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팜프라촌의 고양이 식구들. 오른쪽은 낑깡이, 왼쪽은 낑깡이 딸 인절미


3분 거리를 거의 20분 걸려서 이것저것 구경하며 천천히 방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굉장히 길다. 아직 세 시도 되지 않았다. 밥도 먹었겠다 피곤이 밀려와서 낮잠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지금 자면 밤에 잠을 자지 못할 것 같다.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지난번에 남해에 왔을 때 먹었던 카스테라 생각이 났다. 유자 하면 고흥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남해의 유자가 정말 맛있다. 껍질까지 갈아 먹기 편하게 만든 유자청도 여기저기서 많이 팔 정도다.


특히 ‘카페 유자’라는 곳의 유자카스테라가 아주 촉촉하고 폭신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접시에 담은 카스테라를 먹다가 그 자리에서 두 덩이를 사 갔다. 친구네 집에 한 덩이, 우리 집에 한 덩이. 그 카스테라가 다 떨어질 때까지, 매일 아침마다 드립커피를 내리고 도톰하게 한 조각씩 잘라먹었다. 며칠간 아침마다 했던 행복의 의식이었다. 은근히 두모마을에서는 거리가 있고, 마침 아침에 먹던 빵이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어서, 내일은 아침에 팜프라 식구들과 함께 나눠먹을 생각으로 한 덩이를 샀다. 그리고 카페에서는 우유 한 잔에 카스테라 한 접시를 시켜 혼자 천천히 다 먹었다. 사장님께 지난번에 먹었더니 너무 맛있었다며, 이번에는 남해에 한 달간 지낼 예정이라고 하니 정말 반갑게 인사해 주셔서 감사했다.



남해에 내려온 지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나온 김에 편지지를 사려고 주변을 둘러봤다. 카페 유자 근처에는 아마도책방과 몇몇 독립서점, 그리고 초록스토어라는 기념품 가게가 있다. 아쉽지만 초록스토어에는 내가 원하던 형태의 편지지패드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주 예쁜 노트를 하나 발견했다. 식물성 원단으로 표지를 만든 생분해성 노트란다. 마침 건축설계나 디자인 아이디어를 적을 노트를 찾던 터라 하나 구매했다. 주변 다른 상점들은 닫혀있는 곳이 많아 일단 우체국에 들어가서 편지봉투를 장만했다. 그런데 근처 하나로마트에도, 우체국에도, 편의점에도 편지지패드를 찾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라면 벌써 몇 가지 옵션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이곳에서는 남해읍까지 나가서 다이소에 가는 것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결국 예정에 없던 읍내행까지 하여 편지지를 구매할 수 있었다.


자칫하면 편지봉투를 자르고 펼쳐서 편지를 쓰고 다시 다른 편지봉투에 편지를 넣어 보낼 뻔했다. 아니면 삼각형으로 생긴 드립백을 사서 거기다 편지를 써서 보낼까도 생각했다. 하긴 요새 누가 편지를 쓰겠는가. 감성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엽서를 보낼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쓰고 싶은 건 엽서가 아니라 편지였으니까. 방으로 돌아와 어렵게 산 편지지에 정성 들여 편지를 한 통 쓰고, 손톱을 깎고, 전화통화를 하고, 오늘 하루를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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