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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Jul 26. 2024

남해에서 시간을 기억하는 방법들

돌창고와 기록의 밭

엄마와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눈을 떠보니, 옆에 있던 침구가 정리되어 있는 상태로 비어있었다. 하루종일 인천에서 남해까지 오느라 고생하셨는지 아홉 시 반에 잠드신 걸 보았는데, 새벽에 깨서 산책을 나가신 모양이다. 창문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는 걸 보니 오늘도 어제처럼 맑은 날인가 보다. 전화를 드리니 마을 앞 방파제에서 돌아오는 길이시란다. 나도 얼른 머리를 감고 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원래는 동네 언니와 했던 것처럼 아이스박스에 아침 식사거리를 챙겨 나와 당산나무 밑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아침부터 볕이 너무 강하고 습해서 도무지 밖에서 먹을 날씨가 아니다. 결국 라운지로 들어와서 삶은 달걀과 토마토를 먹고 디카페인 커피를 마셨다. 시간이 맞지 않아 팜프라의 두모사진관을 이용하진 못했지만(사진을 전공하신 린지 님이 직접 당산나무 밑에서 찍어주시는 서비스다), 추억 기록용으로 가져온 일회용 카메라로 엄마를 찍어드리기로 했다. 일단은 빨래부터. 세탁기와 건조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는지 엄마는 잠깐 다시 누우러 방에 가신단다. 비밀번호를 알려드리고 나는 빨래를 기다릴 겸 평상에 누웠다. 인절미가 슬그머니 와서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그루밍을 한다.


빨래를 정리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 엄마의 짐을 차에 실어드리고 나서 당산나무 앞으로 나왔다. 여느 때처럼 평상 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분다. 엄마는 사진 포즈가 정말 자연스럽다. 평상의 난간에 기대어 당산나무를 쳐다보신다. 일회용 카메라로 한번, 디지털카메라로 다시 한번 찍어드렸다. 수령이 200년이 넘었다는 이 나무는 정말 듬직하게 서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엄마와 외할머니를 같이 찍어드리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순천에 사는 친구를 만난다며, 점심때 맞춰서 순천역 근처 친구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셨다. 마침 나도 대학원 동기가 서울에서 오는 날이다. 순천에 있는 마트에서 복숭아와 두루마리 휴지를 사서 엄마를 친구 집에 내려다 드리고, 다시 순천역 앞 이마트에서 동기를 태워 남해로 돌아왔다. 왕복 3시간, 거리로는 160km가 넘는 장거리 운전이다. 그나마 서울에서 제일 오기 편한 방법이 이 방법이다. 새삼 두모마을까지의 거리가 길게 느껴진다.


동기와는 뜨거운 여름날에 잘 어울리는, 밀냉면을 먹기로 했다. 이곳 역시 팜프라 식구들이 추천한 맛집이다. 냉면과 밀면의 단점을 보완하여 만들었다는 설명에 사장님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온육수부터 중복에 맞게 한방 약재의 맛이 나더니, 밀냉면 국물에서도 차가운 삼계탕 같은 맛이 났다. 정신없이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곱빼기를 시킬걸 하고 뒤늦게 후회했다. 지나치게 찬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꼭 나던데, 여기는 배가 싸하게 아픈 느낌도 하나도 없다. 멀리서 와준 동기 덕분에 여러 모로 행복한 식사였다.



냉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족마을이 있어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 닫힌 상점이 많아 아쉬웠는데, 오늘은 다행히 기록의 밭이 열려 있는 시간이었다. 기록의 밭은 기록을 정말 좋아하시는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곳으로, 직접 만드신 여러 가지 소품을 판매한다. 알고 보니 지난번에 남쪽계절에서 구매한 1인용 피크닉 매트도 이곳의 제품이었다. 코스터, 수제노트, 매트, 보자기, 도시락 가방, 다이어리 등을 구매할 수 있다. 무엇보다 거의 모든 제품이 생분해성 소재나 자연소재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자연상점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기록의 밭은 세 가지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데, 상점 공간과 전시 공간, 테라스 공간이 그것이다. 상점 공간 한쪽 구석에는 테이블과 바인딩 재료들이 놓여있었다. 어쩐지 마음이 푸근해지는 풍경이다. 전시된 제품들 사이사이에 바다에서 난 재료로 만든 작품들이 매달려 있다. 전시 공간에는 사장님이 찍은 남해의 사진들과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한쪽 가득 메운 남해 사진들에서 사장님의 남해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낮고 귀여운 통로를 지나 밖의 테라스로 나가면 바다 냄새가 물씬 난다. 이곳 바로 앞에는 그 유명한 죽방렴이 있다. 작은 정원에서도 바다향기가 나는 것이 남해의 매력이다.



지족마을까지 와서 죽방렴을 안 볼 수는 없지. 다시 차에 타서 2분 만에 바닷가에 도착했다. 아까 테라스에서 나던 바다 내음이 더욱 진하게 차로 파고든다. 보기 드문 파란 하늘에 가슴도 뻥 뚫리는 듯하다. 바다 한가운데에 대나무로 만든 전통 방식의 죽방렴이 자리 잡고 있다. 죽방렴으로 잡은 죽방멸치는 비늘이 많이 상하지 않고, 맛도 훨씬 좋다고 한다.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어선들이 이곳이 어촌마을임을 보여주고 있다. 뙤약볕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둣가에 서서 담소를 나누는 어르신 두 분에게서, 바다를 평생 상대한 강인함이 느껴진다.



멀리서 와 준 동기에게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남해의 멋진 공간들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돌창고로 향했다. 시문마을에 있는 돌창고는 1967년에 지어진 양곡비료창고를 보존하여 전시장으로 재생한 공간이다. 바로 옆에는 농산물창고를 카페로, 그 뒤에 보건진료소 건물을 스튜디오로 재생한 공간이 있다. 남해대교가 1973년에 지어졌으니, 이 돌창고는 남해가 섬이던 시절 지어진 곳이다. 섬마을 주민들이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수확한 소중한 곡물을 보관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지금 진행되는 전시는 없었지만, 카페와 스튜디오 공간을 한껏 즐기다 나왔다. 카페는 창문마다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고 있어 어느 자리에 앉을지부터 설레하며 골랐다. 우리가 고른 자리는 흰색 벤치 뒤로 참깨밭의 흰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구석 자리였다. 아메리카노 한 잔과 미숫가루 한 잔, 그리고 달달한 피칸이 올라간 미수티라를 하나 시켰다. 미숫가루는 돌창고가 처음에 열었을 때부터 대접하던 것으로, 지금은 남해에서 난 겉보리, 노란 콩, 현미, 찹쌀을 이용해 만든다고 한다. 달달하고 진한 맛이다. 고소한 미수티라는 묘하게 손이 계속 간다. 지역의 식재료를 사용한 상품들이 눈에 띈다.


스튜디오 공간에는 남해군 용역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에 대한 기록과 사진들, 남해와 근처 도시 학생들의 작품집을 발행한 서적들이 놓여있다. 학생들이 직접 쓴 시에 재치 있는 작품이 많아 즐겁게 읽었다. 돌창고의 지역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작품집으로 표현된 것처럼 느껴졌다. 경남 건축을 모아놓은 책도 발견했다. 처음 보는 건축물들도 많아, 시간이 나면 근처를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긴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기를 두모마을에 데려다주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건우 님을 태우고 남해각으로 향했다. 남해각은 남해대교가 남해군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였던 시절, 휴게소와 여관을 겸한 공간이었다. 그 시절 남해로 신혼여행을 온 부부들이 많이 묵었던 공간이기도 하다. 남해각에 서면 남해대교의 빨간 기둥이 선명하게 보인다. 마침 날이 좋아 멀리까지 시원하게 보이는 풍경에 마음이 뚫리는 기분이다.


오늘 남해각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다. 남해의 소상공인들이 모여서 서로를 알아가고 소통하고, 사업에 대한 고민들을 풀어놓는 '연결학교'다. 남해관광문화재단과 카카카가 함께 만든 자리다. 마침 만나고 싶었던 예비 인터뷰이들이 대부분 와계셔서, 서로의 고민을 나누는 동안 이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며칠 남지 않은 남해에서의 시간 동안 인터뷰할 수 있도록 약속도 많이 잡았다. 감사한 일이다. 그동안 인터뷰하며 만났던 분들, 식당에서 만났던 사장님들, 오며 가며 카페에서 만났던 분들, 가보았던 공간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났다. 군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즐겁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줘서 정말 좋았다. 오신 분들 모두 시간 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 이야기꽃을 활짝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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