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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Jul 25. 2024

미래를 스포일러 당함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과 남해 산책하기

나의 여행 메이트. 어딜 가든 사람들이 알아보는 관계. 나의 28년 후 모습과 똑같이 생긴 그 사람이 남해에 왔다. 바로 우리 어머니. 어렸을 때에도 엄마의 어렸을 적 사진을 보고 나랑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서른 중반이 된 지금은 더 닮아가고 있다. 둘이서 보름간 호주 여행을 다닐 때(https://brunch.co.kr/magazine/travelwmom) 엄마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계속 같이 찍은 셀카로 바꿨는데, 친구들이 연락해서 딸이랑 똑같이 생겼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단다. 엄마의 얼굴 속에서 나와 같은 표정을 발견할 때마다 미래를 스포일러 당하는 기분이다. 스노우로 미래 얼굴 예측 사진을 뭐 하러 보나. 그냥 앞에 있는 엄마 얼굴을 보면 되는데.


아무튼 은퇴한 엄마는 나와 여행 다닌 기억이 꽤 좋았는지 내가 어딜 간다고 할 때마다 놀러 오겠다고 하시는데, 이렇게 먼 남해까지도 진짜로 찾아온 것이다. 이틀의 시간을 비워두고 순천역까지 마중 나갔다. 호주여행을 다닐 때에도 날씨 운이 기가 막히게 좋았는데, 여태 다른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보다 하늘이 더 맑다. 역시 날씨 요정의 행운은 끝나지 않았나 보다. 열차 도착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해 차를 세워두고 열차가 들어오는 플랫폼까지 내려갔다. 열차가 도착하고 저쪽에서 걸어오는 엄마의 얼굴이 환하다. 반갑다고 한번 끌어안고 짐을 들어드렸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라 짐이 간소한데 나 준다고 챙겨 오신 채소가 반이 넘는다. 사랑만큼 묵직한 가방을 들고 차를 타고 남해로 들어왔다.


순천에서 남해까지는 거의 한 시간 반 거리라, 식당에 도착한 시간은 열두 시였다.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여러 식당에 가봤는데, 이곳처럼 부모님이 생각나는 집은 없었다. 모듬장 정식으로 유명한 갯내음식당이다. 사장님이 지난번에 오지 않았냐며 얼굴을 알아보신다. 엄마는 반찬으로 나오는 바다채소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맛을 보았다. 도시농부에게는 가장 흥미로운 주제다. 아니나 다를까 메인 장 메뉴를 들고 오신 사장님께 무슨 해초인지 물어보신다. 사장님은 영업비밀이라며 운을 띄우고는 열성적으로 설명해 주셨다.



다음으로 간 곳은 국립남해편백자연휴양림이다. 팜프라 멤버들에게 추천받아 한번쯤 가고 싶던 곳인데, 숲과 자연, 걷기를 좋아하는 엄마니까 당연히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나도 처음 가보는 지역에 있었는데, 가는 길에 있는 내산저수지와 그 주변 마을 풍경이 아름다워 잠시 차를 세웠다. 산으로 둘러싸인 저수지는 고요하고 평화롭다.



휴양림으로 가는 길에 엄마는 젊었을 때 전국을 돌아다닌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주말이면 밤기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 새벽부터 이 산 저 산 등산을 다녔단다. 겁도 없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혼자 돌아다녔는데, 어느 날 진주 여행을 갔다가 또래 여고생 하나를 만나 사천에 있다는 그 집까지 따라갔다. 영문도 모르고 깜깜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골길을 걸어가며 처음 후회하고, 이상하게 화장이 진하고 커다란 귀걸이를 한 그 집 엄마를 보고 두 번째로 후회하고, 팔에 문신이 가득 있는 그 친구의 오빠를 보고 세 번째로 후회했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지갑 속의 돈이 몽땅 털린 상태였고, 그 여고생에게 차비를 빌려달라고 하니 순순히 내어주어 다행히 무사히 서울에 돌아갔단다. 서울로 돌아가 빌린 차비를 돌려주었는데, 그 후로 혼자 다니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 생겼다고. "아니 거기까지 가서야 무서웠단 말이야?" “그땐 무서운 게 없었지.” 서해, 동해, 남해를 찍고 다니는 내 방랑벽이 어디서 생겼나 했더니 아무래도 유전이었나 보다. 겁 없이 혼자 다니는 것도.


아무튼 사천이 남해 옆에 있는 도시니까 나온 얘기였다. 엄마에겐 사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가 보다. 어쩐지 으스스해진 기분으로 휴양림에 도착했다. 순천역 근처도 식당 근처도 마치 습식사우나에 있는 것처럼 습하고 더웠는데, 높은 해발고도 덕분인지 휴양림 근처는 비교적 시원한 편이다. 차를 대놓고 숲길을 따라 올라갔다. 통나무 방갈로가 길을 따라 주욱 늘어서있다. 이런 곳에서 숲을 즐기며 하룻밤 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길 옆으로는 계곡이 졸졸 흐르고, 나무그늘 덕분에 공기는 시원하다. 곧게 뻗은 편백나무들이 공기에 시원한 냄새를 더한다. 내 옆의 도시농부는 나무와 풀과 꽃의 이름을 하나하나 맞춰가며 즐거워한다.



지난밤에 비가 많이 왔는지, 큰길이 끝나고 전망대로 올라가는 산길이 온통 진흙길이었다. 가볍게 산책할 요량으로 나온 우리 두 사람은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괜히 올라가다가 미끄러져서 다치면 큰일이니, 길을 다시 돌아가 큰길 반대편에 있는 산림복합체험센터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가지각색의 방갈로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잠시 체험센터 건물에 들어가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엄마에게는 아무리 산속이어도 힘든 날씨다. 친절한 직원 분께서 텀블러에 물을 가득 채워주셔서 달게 마시며 잠시 쉬다가 나왔다.



원래는 바로 송정솔바람해변으로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길가에 있는 유자빵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유자카스테라로 유명한 카페 유자를 지나칠 수 없지. 마침 가는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접시 카스테라 하나와 '그냥 우유'로 설명되어 있는 우유 두 잔을 시켰다. 오래된 시골집을 개조해 만든 아름다운 공간이다. 엄마도 팜스테이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한다. 세련된 공간과 촌스러움을 제대로 살린 공간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공간의 결을 만드는 작업은 중요하다. 세련된 공간이라면 소품 하나하나도 세련되어야 하고, 촌스러운 공간이라면 제대로 시간의 켜를 담아야 한다. 둘 중 나은 콘셉트를 고를 수는 없지만 주인이 잘 유지할 수 있는 콘셉트를 골라야 나중에 콘셉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공간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남해에 오는 손님들은 무조건 오아시스에 데려간다. 하도 가서 이제는 '또아시스'라고 부른다. 엄마와 같이 갔으니 오늘은 따뜻한 팥 라테 한 잔과 따뜻한 생강 라테 한 잔을 시켰다. 팥은 몸이 뜨거운 엄마를 위한 것, 생강은 몸이 찬 나를 위한 것.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잔을 반쯤 비우고, 자리에 짐을 두고 해변으로 나왔다.



새벽에 비가 많이 왔는지 모래톱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걷기 좋은 모래다. 계단에 슬리퍼와 운동화를 벗어두고 내려와 바다에 발을 담갔다. 최근 아버지가 무릎 수술을 하여 엄마는 올해 피서는 다 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라도 해수욕을 하니 즐거우시단다. 즐거우시다니 저도 즐겁습니다. 함께 팔짱을 끼고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이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저쪽 끝까지 걷고. 다시 중간 즈음에 있는 오아시스로 돌아와 발을 씻고 슬리퍼를 신고 남은 음료를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는 길에 은모래비치 근처에 있는 마을빵집 동동에서 빵을 사고, 편의점에서 맥주와 무알콜 맥주를 샀다. 그리고 집에 혼자 있을 아버지에게 안부 차 전화를 걸었다. 엄마를 잘 모시고 다니라는 얘기를 하는 아버지에게 "그럼요! 오늘도 만 보 넘게 걸었답니다!" 했더니 "야 이놈아 살살 해~" 하신다. 아버지는 걷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 다들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이고, 각자의 애정표현을 하는 것이다. 껄껄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오아시스에서도 라테를 마셨더니 배부르다는 엄마에게 두모마을 산책을 제안했다. 팜프라촌도 구경시켜 드리고, 보호수와 평상도 소개하고, 동네 어르신과 인사도 나눴다. 그리고 방파제 끝까지 걸어갔다. 길가에서 도둑게와 갯강구와 고양이, 흑염소도 여러 마리 만났다. 이만하면 훌륭한 두모마을 가이드다. 가끔 여우비가 쏟아지긴 하지만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제법 멋진 날씨다. 햇살이 쏟아져 바다에 윤슬이 들었다. 우리 둘의 마음에도 평화로움이 깃든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여행이란, 끝없는 먹부림과 소화시키기 위한 산책의 연속일 것이다. 엄마가 집에서 키운 바질로 바질페스토를 만들어오셨다. 마을빵집 동동에서 산 호밀빵에 발라 먹으니 꿀맛이다. 맥주 안주로 멸치와 마요네즈, 꾸이과자까지 꺼냈다. 결국 둘이서 호밀빵 한 덩이를 끝내버리고, 또다시 배부른 상태가 되었다. 속이 든든해지니 정신이 노곤노곤해지는 법. 오늘 밤은 일찍 씻고 눕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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