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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Jul 23. 2024

이거 샌딩 좀 해주실래요?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건축사사무소 5년, 인테리어 시공회사 2년. 도합 7년의 시간 동안 건축 분야에 있으면서, 내내 5인 미만 기업에서 디자인과 감리를 비롯한 각종 잡무를 해치웠지만 딱 하나 손을 못 댄 영역이 있었다. 바로 시공의 영역이다. 나는 디자이너니까. 내가 저 건축물을, 저 매장을 만들었다고 얘기는 하지만 실제로 지어지는 과정에 손을 댄 적은 없다. 그래서 팜프라촌에서 생활하며 여기의 모든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목공을 다루는 모습이 신기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건축주가 디자이너인 동시에 시공자이면서 관리자이고 사용자인 일은 흔치 않다. 공간의 변화가 필요하면 직접 철거와 재시공을 하고, 가구가 필요하면 만들고, 부속이 사라진 것이 있으면 직접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유정 님이 나에게 사라진 휴지통 부속을 대신해 만든 틀을 주면서 "이거 샌딩 좀 해주실래요?"라고 했을 때 우리는 서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나에게 목공 경험이란 짧은 교환학생 시절 덜덜 떨면서 테이블쏘를 쓰던 기억이라, 실상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목조주택 감리야 자주 나갔지만 일주일에 한 번 나가는 것이 현장의 밀접한 경험을 대신해 줄 리 없었다. 인테리어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정 님은 내가 당연히 건축업계 종사자이니 샌딩 정도는 할 줄 안다고 생각하여 자연스럽게 부탁한 것이고, 나는 나대로 '그걸 어떻게 하지?'에 빠져서 멍하게 "네?"라고 대답하는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유정 님이 직접 샌딩을 하러 간 후에 디자인과 시공의 간극을 줄이는 방법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을 했다. 목공을 한 번쯤은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 기회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또, 디자인만 제대로 하기에도 벅찬데, 과연 내가 (건축, 인테리어, 조경, 글쓰기에 이어) 시공까지 손을 댄다면 그중 하나라도 가치 있게 해낼 수 있을까? 제너럴리스트 중의 제너럴리스트라고 생각하는 나지만 어디까지 궁금증을 해소하며 어디까지 파고 들어가야 하는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오늘은 체크인하는 손님도 체크아웃하는 손님도 없는 황금 같은 날. 게다가 비도 오지 않는 날. 팜프라촌에 온 첫날부터 얘기를 들었던 데크 스테인칠을 하기로 했다. 목재는 아무래도 살아있는 나무로 만든 자재이다 보니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데크재로 쓰는 목재는 자체적으로 방부처리를 하는 데다 기름으로 만든 스테인(오일스테인)까지 입혀서 내구도를 보완한다. 문제는 시간이 흘러 씌워놨던 기름막이 비바람에 씻겨 점점 나무를 보호하는 기능이 떨어진다는 데 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스테인을 칠해줘야 데크를 오래 쓸 수 있다.


먼저 고압 살수 기계로 물을 뿌려 데크를 씻어내고, 붓으로 데크 한 줄 한 줄을 칠하는 작업을 했다. 기온은 28도 정도로 높지 않은데 오래간만에 해가 쨍쨍하여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상황이다. 태양열로 인한 화상을 방지하기 위해 긴 바지를 입고 긴 양말까지 챙겨 신은 다음에, 팔에는 팔토시를 하고 목 뒤까지 가릴 수 있는 농사용 모자를 착용했다. 땀이 줄줄 흘러내릴 게 뻔하니 모자 안에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동여맸다. 셀카를 찍어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농사꾼이다.


고압 살수 기계의 성능은 정말 신묘해서, 구석구석에 초록색으로 낀 물때까지 지워낼 수 있었다. 데크에도 물때가 끼어있었지만 하나하나 지워낼 수는 없어서 먼지를 털어내는 정도로 만족했다. 내친김에 흰색으로 칠한 코부기 2호의 문도 물을 뿌려봤더니, 세상에 유튜브에서 보던 새티스파잉 비디오(satisfying video)가 따로 없다. 검게 떡진 먼지를 걷어내고 뽀얗게 하얀 문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당연하게도 스테인을 칠하는 것도 처음이었는데, 투명한 색 칠이라고 했는데 스테인 자체의 색깔은 살구색이라 신기했다. 뭉치지 않게 데크에 펴 바르니 살구색은 온데간데없고 데크 색만 전보다 진하게 남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줄 두 줄 칠하다 보니 어느새 3시간의 업무 시간이 다 끝나 있었다.



해가 쨍쨍한 낮에 일하는 걸 피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작업을 했더니, 정오 전에 일이 끝나 하루가 긴 느낌이다. 새벽에는 동네 친구를 보리암 1 주차장에 내려놓고 왔었다. 8시부터 마을버스가 다녀서 버스를 타고 올라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 명이라 버스가 운행을 안 했다고 한다. 결국 걸어 올라가려다가 주위 분의 만류에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가 노부부의 차에 히치하이킹해서 보리암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사실 남해에서 히치하이킹은 비교적 흔한 일인데, 대중교통이 불편하고 스몰토크가 되는 지역이다 보니 "어디서 오셨어요" "읍내 나가면 나도 태워다 줘요" 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보리암에 오르는 노부부는 기도 명소라는 이야기를 분명히 듣고 오셨을 텐데, 오르는 김에 공덕까지 쌓으셨으니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었을까.


언니는 보리암에서 금산산장까지 가서 컵라면을 한 사발 들이키고 두모 입구까지 산길로 내려왔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도 작은 바위 큰 바위를 밟으며 내려와야 하는 험지라 한참 시간이 걸렸단다. 점심 식사로 떡볶이와 커리 없는 커리부어스트를 준비해 놓고 전화를 했더니 두모 입구 바로 앞이라고 해서, 바로 차로 태워와서 같이 식사를 했다. 반쯤 무동력으로 남해 여행을 하는 언니의 용기가 멋지다. 그저께는 노도 트래킹, 어제는 서핑, 오늘은 하이킹. 알찬 3박 4일의 여행이었다.


남해가 너무 좋다는 언니에게 왜 좋은지 물었다. 어딜 가든 어디서 왔는지, 좋았는지를 묻는단다. 어떻게 왔는지를 물어보면 꼭 친구가 팜프라에서 일해서 친구를 보러 왔다,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팜프라를 아는 친구들이 뭐 하나라도 챙겨주고 할인해 주는 등의 환대를 해줬단다. 혼자 여행을 떠나면 그저 장소만 방문하게 되는데,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사이를 다니니 훨씬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 속에서 더 큰 행복을 느끼게 되나 보다. 관계에서 오는 힘은 지역을 이동하게도 하고, 지역에 오래 머물게도 한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낮잠을 자라고 언니를 숙소에 밀어 넣고, 나는 라운지로 나와 린지 님과 인터뷰를 했다. 남해는 작은 마을이 많다 보니 마을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두모마을의 분위기에 대해 물으니, '내리사랑'이라는 키워드가 나왔다. 마을의 70-80대 어르신들은 50-60대 어르신들을 챙겨주고, 50-60대 어르신들은 또 이주해 온 20-40대 청년들을 챙겨주신단다. 농번기 한 달 동안 군에서 농번기 급식비를 지원해 주는데, 원래는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만 오는 예산이었으나 마을에서 마을기금을 더해 마을 전체가 함께 급식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그 시기엔 팜프라 식구들도 함께 마을회관으로 가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마을 분들의 얼굴을 익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즈음에 면민 체육대회도 열린다. 두모마을의 일원으로 팜프라 식구들이 출전해서 마을 분들이 이름을 불러주며 응원을 해주신다고. "안녕하세요?"에서 "식사하셨어요?"로 발전되는 관계에서 따뜻한 정이 느껴진다. 농촌이라면 사람들은 이러한 관계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대학원 동기 친구가 싱가포르에 다녀오며 내 부탁으로 싱가포르식 돼지갈비탕인 '바쿠테'의 양념을 사다 줬었다. 전에 싱가포르 여행을 다녀와서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어 팜프라 식구들과 나눠먹으려고 챙겨 왔었다. 냉동실을 찾아보니 수육용 오겹살이 있어 뜨거운 물에 한번 삶아내서 건졌다가 다시 물을 끓여 넣고, 바쿠테 양념과 다진 마늘, 간장 등을 넣어 한 시간 가까이 끓였다. 오겹살을 적당한 두께로 썰어서 다시 넣으니 완전 국수 없는 고기국수다. 아무래도 소면을 넣어야겠지. 언니가 챙겨 와 준 백년초 국수를 삶아 국물에 넣고, 지황 님 어머니가 보내주신 섞박지를 꺼내 곁들였다. 영혼을 채워주는 고기국수, 아니 바쿠테다.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언니를 남해종합터미널에 태워다 줬다. 차에서 내리는 언니의 표정이 밝아 나까지 행복해진다. 남해의 남은 나날들도 행복한 일들로 채워나가 봐야지.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 저녁에는 전에 방문했던 흙기와라는 카페 사장님과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흙기와 근처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사장님을 만나러 갔다. 두 시간 넘게 왜 남해에 왔는지, 어떤 생각으로 공간을 만들었는지, 어떤 가치를 펼쳐나가고 싶은지, 어떤 관계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남해에는 이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다. 이야기들을 어떻게 잘 담아 논문으로 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있지만, 일단은 잘 듣고 잘 소화해내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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