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씨의 공장기 #3
싱가포르에서 만난 사람들 - 호텔 로비의 키 큰 직원아저씨
출장 오기 전 날, 호텔에 수영장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무작정 짐가방에 수영복을 챙겨넣었다. 촌스럽게도 여태 여행지의 호텔에서 한번도 수영을 해본 적 없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수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벽 2시가 다 돼가는 시간에 체크인하고, 다음날 아침 카페테리아에 갔을 때 발이 저절로 멈춰섰다. 고층 건물들이 에워싼 3층 테라스에 길다란 푸른 빛의 물이 잔잔하게 햇빛을 받고 있었다. 양쪽으로 선베드가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 아래로 데크가 군데군데 물기에 젖어 반짝이고 있었다. 조식이 입으로 들어가는둥 마는둥 수영장을 구경했다.
일정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어 일찍 끝났다. 싱가포르의 아파트들은 규모나 가격에 상관 없이 대부분 수영장이 갖춰져 있다. 일년 내내 우기와 건기로 나뉠 뿐, 연중 30도를 드나드는 날씨 덕분인듯 하다. 1월의 싱가포르는 우기인데, 내내 맑다가 갑자기 흐려져 하늘에서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렸다. 호텔에 도착하니 아직 하늘에는 구름이 덮여 굵은 빗줄기가 한두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수영이 가능한지 물어보려고 1층 리셉션에 물어보니 키가 아주 큰 중국계 아저씨가 기다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대답을 해주었다. 비가 그쳐야 수영이 가능하고, 열시까지만 운영한다고. 객실로 올라가 창가에 앉아 내내 고개를 들어 날씨만 살피며 책을 읽었다. 마음이 급해 하늘의 구름은 느리게도 움직이고, 저 아래 사람들은 우산을 쉽사리 접지 않았다.
바닥에 빗물이 부딪쳐 일렁이는 무늬가 없어지자마자 다시 리셉션 데스크로 쪼르르 내려갔다. 키 큰 아저씨는 밖을 살피더니 수영을 해도 된다는 사인을 보냈다. 수건과 목욕가운, 수영복을 챙겨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물은 낮에 내내 햇빛에 데워져 따뜻하게 몸을 감쌌다. 등을 물에 맡기고 배영을 하니 고층건물이 감싼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구름이 군데군데 얼룩져 보라색, 푸른색, 핑크색으로 거칠게 그린 유화 그림 같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수영장에 내가 차올린 물방울 튀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리다 하늘로 사라진다. 주변 건물들 창문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물에 반짝이고, 사방이 고요하다.
다음날 일정은 더 빨리 끝나 비가 오기 전에 재빨리 수영장에 내려갔다. 이른 저녁부터 혼자 수영을 하고 있으니 야외테이블을 정리하러 나온 직원이 한참을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드니 빙긋 웃으며 마주 흔들어주고는 카페테리아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시내로 나가 튀긴 에그누들면을 한접시 해치우고 호텔로 들어오니 한밤이 되었다. 키 큰 아저씨가 빙긋 웃으며, 오늘은 수영 안해? 근데 어떡하냐 11시라 닫았는데! 라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진즉 수영하고 다녀왔지~ 라고 웃으며 응수하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d. 2018.1.12-15. 3박 5일간의 싱가포르 출장기
공장기(空場記) : 공간과 장소에 대한 기록
우리는 매일 여행을 하며 살아갑니다. 집에서 회사로, 학교로, 카페로, 서점으로, 그리고 다시 집으로. 여행에서 만난 공간과 장소에 대한 기억을 담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