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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희 Oct 30. 2015

누군가에게 "천국"이었던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여행의 의미-순례 NO.1


거꾸로 쓰는 여행기-순례#1 여수에서의 24시간

여름 동안 자료 조사를 핑계 삼아 짧은 여행을 많이 다녔다. 여행기를 남기고,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선교사분들의 이야기도 알리겠다고 사진도 많이 찍었지만, 쌓여있는 책들과 논문과 무리한 스케줄은, 사진들과 기억들도 쌓아 놓게 만들었다. 결국 마지막 짧은 여행기부터 거꾸로 쓰기로 했다.


전남 정보문화진흥원에서 진행하던 스토리 공모에 기획안을 낼 때 내 머릿속에는 15권 가까이의 시리즈였고, 기획안을 낼 때는 10권 정도로 줄었고, 창작지원금을 받게 되었다고 할 때쯤에는 2권으로, 그리고 협약서를 쓸 즈음에는 2권의 초고와 썸네일 스케치까지 하는 걸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지난 2달 동안 전체 기획안에서 10권의 목록을 정하고, 2권의 초고를 썼다. 2권 중에 두 번째 책의 주인공인 "우월순(R.M.Wilson)"선교사의 자료 때문에 여수에 다녀왔다. 한편으로는 썸네일 스케치는 자세히 그리는 것도 아닌데 굳이 다녀올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했고, 남편과 시간이 맞지 않아 미루다 보니 많이 늦어졌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곳을 다녀와 보지 않고 초고를 정리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 같아 급하게 출발했다.



여행은 갑작스러울수록 즐겁다. 

아침에 출발을 결정하고 숙소를 알아보고 짐을 챙겼다. 아이들은 하루 결석하는 것으로 신이 났고, 이리저리 갈 곳을 찾을 필요가 없어 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여수에 있는 애양원에 가서 자료조사를 해야 한다는 한 가지의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 아마 나는 여행이란 기분이 덜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작업도 잘 안돼서 쫓기는 마당에 이틀을  빼먹는다는 건 조금 나를 불안하게 했기 때문이다.

올 여름에 다닌 짧은 여행들은 늘 목적이 있었다. 선교사들의 자취가 남은 곳과 기념관이나 사택, 교회를  다녀오고 사진을 찍고 시간 순으로 정리해야 한다는 목표 때문에 여름 내내 다닌 여행은 늘 빠듯한 스케줄로 한 번에 최대한 많은 곳을 다녔었다. 목표가 있는 여행은 자칫 행군이 되고 여행의 여유를 잊게 만들며, 같이 다니는 아이들은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다. 반면에 목적이 있는 여행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 준 다는 것이다. 선교사분들의 지나간 삶을 보면서 그 작은 몸짓들이, 사랑방에서 시작한 작은 교실이, 지금의 대학교가 되고 학교 법인이 되어 셀 수 없이 많은 배움을 낳았으며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나비효과"라는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의 작은 선택들의 결과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귀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나쁜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비효과 [butterfly effect, ─效果] (두산백과)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과학이론이다.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E. Lorentz)가 1961년   기상관측을 하다가 생각해낸 이 원리는 훗날 물리학에서 말하는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의 토대가 되었다. 변화무쌍한 날씨의 예측이 힘든 이유를, 지구상 어디에서인가  일어난 조그만 변화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날씨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처음에 이 현상을 설명할 때는 나비가 아닌 갈매기가 사용되었지만,   이후에는 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갈매기를 나비로 바꾸었다. 이 가상의 현상은 기존의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른바   '초기 조건에의 민감한 의존성', 곧 작은 변화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경우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영화를 보고 즐거움을 얻었다면, 목적이 있는 여행에서는 '선한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여수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든 생각은 늘 타고 다니는 차였다. 우린 우리가 누리는 것 들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차를 타고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스마트폰을 들고 어디에서나 원할 때, 전화를 할 수 있다. 우리가 늘 그런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90년대만 해도 삐삐를 쓰던 시절이 있었고, 초등학생 시절만 해도 당연히 우표를 붙여 편지를 보냈다. 그 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딱 130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 있다. 아니 90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지금 차를 타고 달리는 이 길 위를 어둠을 타고 걸어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가고 있는 애양원은 광주 봉선동에 있던 광주 나병원이 옮겨간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 불리던 포사이트 선교사가 오웬 선교사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광주로 오는 길에 한센병에 걸인 여인을 만났다. 가족도 버린 한센병 여인을 포사이트 선교사는 자신의 말에 태워 광주로 왔다. 포사이트 선교사가 한센병 여인을 부축하고 말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 최흥종 목사(이때는 목사가 아니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주님 같은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는 깊은 감화를 받고 한센병 환자들을 돕게 되고 후일 목사가 되었다. 하지만 포사이트 선교사가 광주에 왔을 때는 이미 오웬 선교사가 숨을 거둔 뒤였다. 포사이트 선교사가 데려온 여인은 처음에 닥터 윌슨의 진료소에 머물렀지만 환자들의 거센 항의로 사용되지 않는 벽돌 가마에 옮겨졌다. 그녀는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죽었다.

오웬 선교사는 구하지 못했지만 이 한센병 여인이 시작이 되어, 광주의 의료 선교사였던 윌슨과 선교부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 작은 움직임은 광주에 나병원을 만들었고 애양원까지 이어졌다. 


고속도로를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길을 걸어서 갔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길도 아닌 곳으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피해 어두울 때만 길을 갔고, 한센병 환자들이었다. 지금처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음식을  사 먹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가로등도 없고, 길도 포장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며, 손에 가진 것 하나 없이 낮에는 길에서 떨어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쉬어야 했다. 게다가 처음으로 나환자들을 더럽다 하지  않고 사람으로 대해 주었던 포사이트 선교사의 죽음을 기린 비석까지 메고 걸어갔다. 가진 것 없는 환자들의 몸으로 정말 힘겨운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광주에서 지금의 여수 율촌면 신풍리로 이주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 그 힘겨움이 얼마만큼 이었을 지 우리는 알 수 있을까? 

신풍리로의 이주는 점점 모여드는 한센병 환자들과 한 곳에 살수 없다는 주민들의 항의로 시작되어, 일제의 "선의"라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의도로  마무리되었다. 내가 그때의 사람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는 다를 수 있었을까?

여수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야경을 보았다.

여수의 야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부산과는 다른 느낌이다. 왠지 아늑하고 따듯하다. 밤바다도 그렇다.

나에게 여수 밤바다는 늘 따뜻함이었고 아늑함이었다. 그들에게도 그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시내에서 나와 한참을 외곽으로 달렸고, 공항 담벼락을 따라 어두운 길을 지나 숙소로 예약한 애양원에 있는 치유의 숲으로 도착했다. 토플 선교사의 이름을 따라 지은 토플하우스에서 열쇠를 받아 방갈로처럼 따로 떨어져 있는 숙소에 가서 짐을 풀었다. 생각보다 예쁘고 깨끗한 숙소에서 하룻밤을 편안하게 보냈다.

밤에 도착해서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아침이 되자 보였다. 예전의 병사 중 잘 보전되어 온 15개의 병사를 개조한 치유의 숲은 휴양림의 펜션같이 보였지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외진 곳으로 걸어서 이주해 와야 했고, 그저 피난처를 얻은 것만으로도 살아갈 소망을 얻었던 사람들에게 이 곳은 세상 전부였을 것이기에 나에게는 그저 방갈로가 아니라 다르게 느껴졌다.


애양원 역사 박물관과 성산교회로 걸어가는 산책로 사이로 물이 빠진 갯벌이 보였다. 

푸르른 이슬로 촉촉해진 우거진 풀과 나무들 사이로 민들레들이 한가득 날아갈 준비를 마치고 있고, 아침 햇살은 너무도 따뜻했다. 따뜻한 아침, 박물관 올라가는 길은 빛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박물관은 새로 지어진 한센인 기념관과 애양원역사박물관 두 군데였다. 

그동안 책에서 보아 오던 것들과 남아있는 자료들을 보았다. 


천형이라 불리는 한센병을 앓았던 사람들의 고통이 보였다.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아무 데도 있을 곳이 없었던, 구걸조차 힘들었던 길에서 떠돌아야 했던 그들의 삶에서 유일한 희망이 되어줬던 선교사들의 몸짓을 보았다.


병원 문 앞에서 별과 달과 함께 지내며 병원에 들어가게 될 날만을 기다리던 한센병 환자들에게는 

애양원이 천국이었고, 애양원의 문은 천국의 문이었다.

 애양원의 초대 원장이고 광주 나병원의 원장이었던 윌슨 선교사는 외국에서 방문객이 오면 일부러 병원 문 앞을 지나고 병원 안의 환자들을 만나게 했다. 문 앞에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의 처참한 모습과 안에 있는 환자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 어느 누구라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적은 예산으로 더 많은 환자들을 받고 자립하기 위해 밭을 만들고 스스로 먹을 채소를 키우고 돼지와 토끼를 키웠다. 한 가지 변칙적인 방법은 혹자는 안 좋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환차익이었다. 당시 중국에 있는 미국 은행들은 시장거래율로 중국 돈을 환전해 주었고, 같은 어음이라도 북경으로 가서 환전을 해오면 두세 배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병원의 재정을 확보하고 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었고,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도 애양원이 운영될 수 있었다고 탈마지 선교사는 기록했다. 윌슨 선교사는 1908년에 조선에 와서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가 광복 후에 다시 돌아와 소록도와 애양원의 환자들을 돌보았고, 그의 나이 68 세일 때 고향에 돌아갔다


누군가에게 "천국"이었던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로버트 맨튼 윌슨과 여러 선교사들이 함께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보았고,

버림받았던 사람들이 살아낸 시간과 버텨낸 힘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음이 몹시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한 소녀가 문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너무나 어린 나이였는데 

그 작은 문둥 소녀는 홀로 내버려져 있었습니다.

나는 병원 수위를 찾아 그다지 많지 않은 돈을 치러주었습니다.

액수는 너무 적었지만 그 아이에겐 천국을 선물한 돈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문을 지나 들어가면서 그 소녀는 내게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 조그마한 소녀가

나에게 천국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아더 한센-










<여수 여행 정보>

여수 여행정보 사이트 주소입니다.

http://www.ystour.kr/kr/main.jsp

여수를 여러 번 갔었는데, 숙소가 굉장히 많습니다. 한옥 민박도 있고, 디오션 리조트같이 워터파크가 있는 곳도 있습니다. 게스트하우스도 혼자 가신다면  추천합니다. 제가 가본 곳은 "터틀빈"입니다. 다시 게스트하우스를 간다면? 갈 것 같습니다. 

여수의 유명 맛집은 블로그들에 많이 올려져 있습니다. 만두집은 생각보다 맛있었고요. 유명한 로타리 식당도 게가 싱싱해서 맛있었습니다. 양이 많으니 참고하시고, 지나치게 깔끔한 여성분들은 안 좋아하실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블로그들에 올려진 간장게장 집도 맛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행의 즐거움은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도 저는 좋은  듯합니다.


+빅오쇼  061-659-2046

빅오쇼는 소셜에서 미리 예매하시면 조금 저렴하지만, 당일 구입한 것은 다음날 사용이 가능하니 미리 예매하셔야 합니다. 빅오쇼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저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고, 갑자기 가서 예매를 못해서 스카이타워와 엑스포 공원에서 보았습니다. 멀리서 보는 것도 저는 나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서운해했습니다. 표를 구입하고 정면에서 보아야 문어랑.. 쇼가 다 보입니다.                                                                                              http://bigo.expo2012.kr/


+여수 스카이타워      

전라남도 여수시 박람회길 1  

061- 659 -2064                                       

엑스포 공원 안에 있는 스카이 타워는 입장료만 내면 입장할 수 있습니다. 20층 높이의 전망대라서 여수의 야경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빅오쇼와 시간을 맞추어 가시면 빅오쇼를 내려다 보실 수 있고, 꼭 음료를 주문하지 않아도 나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른은 입장료 2,000원이고 아이들은 1,000이었습니다.

주의하실 점은 스카이타워 입구에서 현찰로 주차 요금을 2,000원 받는 것과, 스카이타워는 오후 8:00까지라서 7:50분이 되면 내려와야 합니다. 저희는 스카이타워에서 빅오쇼를 50분까지 보고, 공원을 걸으며 남은 빅오쇼를 멀리서 보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 운영시간 : 주중 10:00~20:00(입장 마감 19:30)

                   주말 09:00~22:00(입장 마감 21:30)    

   ※ 매주 월요일은 연주 없음

   ※ 현장 매표만 가능


+애양원역사박물관과 한센 기념관

전남 여수시 율촌면 산돌길 31(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도성길  30-15 )                     

061-682-9808~9

○ 운영시간 :  09:00~18:00

 휴관일은 공휴일과 월요일입니다.


+애양원 펜션 치유의 숲

전남 여수시 율촌면 산돌길 31

010-3621-0865

숙소는 치유의 숲과 토플하우스 두 가지입니다. 치유의 숲은 방갈로 형식의 독채입니다. 공동 취사장은 따로 있습니다. 드라이기는 없으니까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셔야 합니다. 토플하우스의 숙소는 독채가 아닙니다. 

근처에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이 있어 같이 관람하시면 좋습니다.

http://www.aeyangwon.co.kr/pension/intro.php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여수시 율촌면 산돌길  148                       

061-682-9534

○ 운영시간 : 월~토 :  09:30~18:00

http://www.aeyangw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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