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증

쌀쌀한 면역기

by 일요일의 조작가

버스의 덜컹거림이 멎어들 때쯤, 나는 살그머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잠이 든 것은 아니었지만 눈을 감고 현실이 아닌 꿈속 어딘가에 간신히 한 발자국을 디뎠던 듯했다. 버스의 피스톤 유압장치에서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나자 몇 안 되는 승객이 그 느린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그들의 대열에 먼 뒷발치로 천천히 합류한다. 버스 내 히터 탓에 공기가 제법 답답했다. 나는 벗어놓은 두꺼운 외투의 지퍼를 미리 올린다. 말라버린 땀자국이 금세 되살아났다. 그래도 내 몸이 망각했던 바깥의 추위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별 수 없다.


[엣취]


터미널에 발을 내닫자 오래된 건물에 찌든 곰팡내가 서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맑고 차가운 공기와 섞여 코를 간지럽힌다. 칠이 벗겨진 청록색의 외관과 불이 켜질까 의심되는 낡은 네온 간판이 이곳이 어디인지를 간신히 알려준다.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다음 행선지를 기다리는 승객은 전부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다. 버스의 짐칸에서 봇짐 사이에서 홀로 우뚝 솟아 있던 내 캐리어를 꺼낸다. 버스 기사가 주름진 미소를 짓는다. 나는 조금 덜한 미소로 화답하고 짐을 챙겨 자리를 뜬다. 맑은 콧물이 주룩 흘러나온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렇게나 닦아내고는 휴대폰을 연다. 몇 년간 연락하지 않았으나 잊지는 못할 친구의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쿨럭]


친구가 든 막걸리 잔이 흔들리며 내용물이 넘실거린다. 그 때문에 그의 손이 젖는 것이 보였다. 나는 테이블에서 냅킨 몇 개를 뽑아 내민다. 그는 손에 묻은 술을 닦아내더니 말을 이었다. 뽀얬던 그의 얼굴은 불에 그을린 듯 시커맸다. 한여름 지나면 다시 하얗게 돌아오던 피부도 십여 년의 뙤약볕 아래선 달라졌다. 에어컨 설치기사를 하며 더운 곳과 찬 곳을 번갈아 돌아다니어서인지 가끔 잔기침이 나온다고 한다. 그는 기침이 미처 가시지 않은 채 다시 잔을 들어 들이켠다. 그래서 듬성듬성 난 턱수염 사이로 막걸리가 조금씩 흘러내린다.


누구는 음주운전을 하다 논에 차가 빠져 죽었더랬다.

누구는 서울로 올라가 식당을 한단다.

누구는 해외에서 온라인 도박사이트를 하고 있단다.

자기는 결혼할 여자가 생겼단다.


결국 내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친구의 이야기에 끝까지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막걸리 몇 통을 비우자 낡아빠진 주점의 누런 벽지와 누런 조명이 구분이 가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려고 밖으로 나온다. 겉옷을 입지 않아도 술기운 때문인지 춥지는 않았다. 흡연구역을 찾지도 않고 바로 담뱃불을 붙인다. 콧속을 메운 매운 연기와 차가운 기운에 갑자기 재채기가 나온다.


[엣취훌쩍콜록]


콧속으로 콧물이 가득 찬다. 어느새 따라 나온 친구가 냅킨을 내민다. 자기도 한 대만 달랜다. 언제 담배를 배웠는지 묻기도 전에 서투르게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더니 연신 기침이다.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둘 다 한참을 낄낄거렸다.


눈을 뜨니 누런 장판과 누렇게 뜬 흰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친구는 흰다리새우처럼 몸을 한껏 웅크리고 코를 골고 있다. 벽에 세워둔 캐리어는 자물쇠처럼 굳어 있다. 나는 친구를 깨우지 않고 그대로 캐리어를 들고 나온다. 창문이 없는 아파트의 복도는 춥다. 캐리어를 끌면 복도식 아파트의 단잠을 깨울까 손잡이를 잡아 들었다. 사실 내가 들고 온 캐리어는 무겁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버스에 올라탄다.


[콜록콜록]


옆 자리에 앉은 노인이 마른기침을 한다. 나는 그 좌석의 환풍구를 닫아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고맙다며 봇짐을 풀어 곶감을 하나 내민다. 흰 분이 겉면을 가득 메워 원래의 색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의 손만큼이나 거친 곶감을 한사코 거절하다 못 내 받아 들었다. 대충 중간에 버릴 심산이었으나 그의 시선은 떼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제야 그는 환하게 웃으며 좌석에 등을 기대었다. 겉모습과 달리 맛이 제법 달다고 느끼며 어느새 잠이 들었다.


서울까지는 깨지 않고 도착했다. 옆 자리의 노인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버스에서 내린 뒤 외투를 입었다. 공기는 여전히 차갑다. 그러나 재채기는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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