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 우천시 기행문

by 일요일의 조작가

맑은 날에 비를 생각하려니 마치 왁자지껄한 클럽에서 누군가 불쑥 힘들었던 기억을 묻는 것만큼 어색한 기분이 듭니다. 그런 과거는 카메라 앱의 필터가 적용된 사진처럼 잡티 없는 순간의 단상만이 드물게 떠오를 뿐입니다. 당시에는 분명 뾰족하고 모난 순간이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도 맑은 날에 비를 떠올려보자면 어렸을 적에 이런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태풍 매미가 전국을 휩쓸던 무렵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방학 기간 내 태안에 위치한 고모댁에 가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곳에는 제가 유독 좋아하던 사촌동생이 있었거든요. 그날은 창밖에 굳건히 서 있던 미루나무가 쓰러질 만한 비바람이 불었던 날이었습니다. 그 미루나무 같은 저의 고집으로 차가 출발했죠.


지금 기억에도 차 한 대 없는 도로와, 쓰러진 가로수, 불어난 하천, 차 유리를 부술 듯한 빗방울의 파열음이 있습니다. 차체가 흔들리는 아찔한 상황에선 다 큰 저 역시 운전대를 잡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어리석고 부끄러우며 아찔하기까지 한 기억입니다. 그럼에도 차 시동을 걸고 몇 킬로미터나마 달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만 남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야기는 맑은 날에 우천을 떠올린 것이자 성인이 된 후 되돌아본 부끄러운 어린 날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님께 이 이야기를 드리면 어떻게 추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의 기억도 풍화되어 그저 ‘철없는 어린 아들의 일화 중 하나’로만 남아 있길 바랍니다.


차라리 성냥팔이 소녀처럼, 비 오는 날에 맑은 날을 떠올리는 건 더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지금이 먹구름으로 가득하다면 그 화사했던 과거는 지금을 버텨낼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화를 내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낸다면, 분명 웃으며 함께 추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친 하루 끝에, 문득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옛 친구들을 찾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찌푸린 날은 필터 없이 촬영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핸드폰 속의 갤러리처럼요.


당신에게도 오늘처럼 맑은 날이 한 장씩 쌓여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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