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a웨이 May 24. 2022

머리로 쓴 글, 마음으로 쓴 글

- 블랙커피  한 잔의 추억을 소환하며 -


머리로 쓴 글은 머리를 움직이고

마음으로 쓴 글은 마음을 움직인다


미친 듯이 브런치에 쏟아내던 내 마음이

어느 순간 멈춰지고, 글 올리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브런치 글로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동참하자는 작가님 글에  라이킷 해 놓고

 정작 실천하자는 제안에는 무응답인  나를 포함한 작가들에게  양심을 묻는 글.



그분 글에 이렇게 초연하지 못한 것은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거나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찔리는 대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브런치에 왜 글을 쓰냐고?

글을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글로 현실을 바꾸려고?.... 글로 누군가를 위로하려고?

그런 것들은 지금 내겐 사치다.

냉정하게 내 현실을 직시하면 내 소풍 끝날 날이 얼마 안 남았다.

더구나 그 얼마 안 남겨진 시간마저도  망가진 몸과 함께 다.

망가진 몸이 수시로 내게 상처와 치욕을 줄 것이며

그래도 견디고  살아야 하나?

죽지 않고 살아 보려고 글을 쓴다.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브런치에서  전직과 직업을 다 공개한 것은 내 딴에는 용기를 내서

까발린 것이다. 내 누추한 알몸을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관찰하는 것

만이 망가진 몸이 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단숨에 글을 쓰다가 , 다시 한번 그 작가님 글을 정독한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 반박할 언어를 찾을 수 없었다.

 맞은데 , 옳은데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왜? 움직이지 않을까?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나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作 <살아남은 자의 슬픔>     



80년대 젊은 영혼들이 맨몸으로 탱크와 총과 싸우다 화염병 드는 광경이 거실 창 밖으로 보이는

 대학교 정문 앞 빌라에 살던  시절. 그렇다. 나는 그 짐승 같은 미친 시기에도 품에 안은 자식들  

핑계로 강 건너 불구경해서 살아남았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를 "비겁하고 이기적인 자는 살아남는다 "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살아남은 자의  변명"으로 바꾸어서.


  그렇다! 나는 본래 이기적이고 비겁하고 소심한 사람이다



매음녀 1


..............

이렇게 살 바엔 -

왜 살아야 하는지 그녀도 모른다.

쥐새끼들이 천장을 갉아댄다

바퀴벌레와 옴벌레들이 옷가지들 속에서

자유롭게 죽어가거나 알을 깐다.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들추고 그녀는

 매일 아침

자신의 시신을 내다 버린다.

무서울 것이 없어져버린 세상.

철근 뒤에 숨어 사는 날짐승이

 그 시신을 먹는다.

정신병자가 되어 감금되는 일이

구원이라면

시궁창을 저벅거리는 다 떨어진

누더기의 삶은......

아으,

모진 바람.


이연주 - <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


산다는 게 진실이라는 몸을 파는 매음녀처럼 느껴졌던 시대, 제정신으로는 생존하지 못하고 정신병자가 되어 감금되는 일을 오히려 구원이라 생각하게 했던 시절. 이 시인의 순수한 영혼은 끝내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의 길을 택하고 만다.     


글과 현실 참여의 최고의 정점으로 귀하게 여기며  소중하게 간직해 온 책 들을 오랜만에  펴본다


저렇게 순수할 자신이  없기에 국문과 생들의 로망인 시인의 꿈을 버렸고 교사운동도 동료 교사

틈에 끼어 겨우 서명 명단에 한두 번 부끄럽게 올리다가   최소한의 연금 나오는 기간까지만

버티다가 교사직도 버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누군가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고

그냥 진심으로 차 한 잔 제대로 대접하는 찻집 주인이 된 것이다.


누가 당신의 구질구질한 변명 듣자고 했나?

그냥 링크 거는 게 머가... 힘들다고..

욕하셔도...

구질구질한 변명꾼.. 늙은 내  찐 자화상이다.




지금처럼 고급 생두도, 고급차도 , 완벽한 비율로 섞인 커피믹스도 없던 그 시절. 가끔 미국 다녀오신 지인에게서  냉동 동결 미제 오리지널 인스턴트용 커피 한 봉지 받으면 득템 했다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던 그때.  차대 접이라면 분말가루 진득한 거의 수프 수준인 땅콩 차나 율무차, 설탕 범벅인 유자차, 아니 가장 흔한 것이  맥스웰하우스 커피, 프리머, 설탕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서 만든 커피 대접이었다. 어떤 이는 커피 2스푼 프림 2스푼 설탕 2스푼, 어떤 이는 커피 1, 프림 2, 설탕 3 어떤 이는 커피만 1 등으로  커피와 프림과 설탕의 배합 취향도  제 각각이었던 시절. 그 사람의 커피 배합비율을 안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고 질문 없이 알아서 커피 한 잔 타주는 것이 친하고 가깝다는 증명이 되던 시절.  


   

그 시절 부끄러운  자의식이 있던 주변의 지인들은 금욕적인 커피를 원하고 좋아했다.


달달한 욕망의 설탕 빼고 허세의 거품인  프림 빼고 딱 한 스푼의 커피 알갱이만 투박한 도자기 머그컵에 투척해서 뜨거운 물 가득 넣어서 마시던 그런 커피.

도자기 머그컵은 청각장애인 작품 전시회에 가서 사 준 못생겼지만 진심이 담긴 도자기 컵...



내 브런치의 구독과 라이킷 수의 번창을 위해서 품앗이 라이킷을 누르지나 않았는지부터

반성하며 다 지우고 제로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나 자신만을 위한 욕망과 실천하지 못하는 글은 진짜  부끄러워해야 하는 말씀

맞습니다.!


 그러나

 머리로 쓰는 글은 머리를 움직이고 마음으로 쓰는 글은 마음을 움직입니다ㆍ등 떠밀린

내 마음이 내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ᆢ





       





작가의 이전글 늙는 것이 패배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