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번 주부터 딸 집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어린이 하나를 온 마을이 키운다 하더니 이제 어린이 집을 다니게 된 21개월 손녀의 양육은 어린이집이라는 공적 기관과 엄마, 아빠, 외할머니, 고모 가 총동원 된다. 이른 시간 출근하는 엄마가 아기 등원 시 입을 옷, 간단한 먹을 것을 준비하고 나가면 , 조금 늦은 출근이 가능한 아빠가 세수시키고 옷 입혀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집 등원을 시킨다. 오후 4시 퇴원부터 엄마 퇴근 6시 -7시까지 시간을 고모와 혹은 외할머니인 내가 교대로 돌봐준다. 자기 몸도 골골이면서 웬 육아는... 하는 분도 계시는데 나에겐 꼭 해줘야 할 세대별 품앗이 다는 생각이다.
내가 보낸 워킹맘의 그 힘든 시간들이 친정 엄마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통과할 수 없었듯이
나보다 더 전문적인 딸의 일도 얼마나 일분일초를 긴장해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기에 열심히 돕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결과는...
도시 외곽에 있는 내 거주지에서는 왔다 갔다 하는 건 힘들어 주일 이삼일은 딸 집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내향적이고 자의식 과잉인 나는 매사에 편하게 쉽게 가 없는 내가 생각해도 짜증 나는 캐릭터이다.
그런데다 자다가 코 골고 잠꼬대가 심한 할머니가 되니 여간해서는 남의 집에서 -아무리 딸집 이래도 - 자는 경우가 없었다.
남의 일기장을 훔쳐본 것 같은 내밀한 사적 기운이 가득 담긴 공간에 들어서면 왠지 나도 내 존재가 낯설게 느껴지며 불편해져 화장실 출입이 거북해지고 배설도 제대로 못했다.
손녀의 방에서 잤다. 아니 , 손녀 침대는 엄마아빠 방에 , 손녀 장난감들은 거실로 가출하고 손녀의 책장만 남은 손녀의 서재에서 잠을 잔 셈이다. 손녀의 서재. 한 번씩 들릴 때마다 그냥 손녀가 들고 오는 대로 읽어주기만 했던 손녀의 서재를 새벽부터 일어나 비로소 꼼꼼히 훑어본다.
소장한 책만으로도 그 사람의 내면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게 책이다. 평생을 책 오타쿠로 산 내 경험담이다 손녀의 서재에는 아직은 손녀에게 향하는 엄마의 육아철학이 가득 담긴 책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딸 취향대로 전집류가 아닌 다양한 책들로 구성되었다.
"너 이건 네가 고른 것 아니지?"
"어떻게 알았어? 나보다 먼저 엄마 된 주연이가 골라준 것."
"ㅎㅎ 어쩐지. 이건 그 한 달에 한번 독립서점에서 선정해서 보내 준 책이지? 이건 네가 고른 책이고"
딸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웃는다
유모차 손잡이도 방풍막 씌우는 것도 눈썰미 있게 못하고 더듬더듬.. 떡볶이 간식의 맵기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어리바리 할머니도 무언가 잘하는 것이 있다면 책인데 비로소 내 열등감이 조금 사라진다.
손녀도 귀신같이 잘 알아서 책만 들면 나에게 안겨서 내 이부자리에 같이 엎어져서
같이 책을 읽는다
그러나 책을 읽어주다 보면 내가 오히려 더 많이 감동받고 깨달음을 얻는다
오래 살고 보니 알겠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서 건강한 몸으로 남과 잘 어울려 사는 것 이상 없다는 것
읽어 주다 보니 알겠다
진짜 아이책을 읽어야 할 사람은 노인이라는 것
아장아장 걷다, 폴짝 뛰다 , 다다다닥 달리다 , 엉금엉금, 살금살금.
책 속의 걷는 동작에 대한 그림을 보고 행동을 손녀와 함께 하면서
몸을 움직이다 보니...
피곤하여 아주 곯아떨어져서 찍소리 없이 잘 잔다. 잘 자니 변비도 사라져 잘 싸고
딸 퇴근을 기다리며 해놓은 -쌀통에서 쌀씻는 그릇에 퍼 담고 밥솥의 취사 스위치 눌렀다고 손녀는 아가 자기가 밥 했다고 항상 말한다- . 밥에 퇴근길 딸이 사 온 식재료로 딸이 만든 찌개로 저녁을 잘 먹고...
잘 먹고 잘 자고 잘싸니 건강해졌다.
오늘은 쉬는 날. 내일은 잠 잘 오는 내 치유공간이자 내 마지막 도서관이며
손녀에게는 첫 도서관인 손녀의 서재로 출근하는 날. 오늘도 잘 쉬어야지!
오늘도 초등 그림일기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