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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Dec 26. 2023

돌 위에 새긴 생각

큰비 온다고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감옥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재벌이라도 한 번에 4만 원 이상을 쓸 수는 없습니다.


나는 매주 공책과 볼펜을 구매합니다.

공책은 어느 소에선가 만드는가 봅니다. 

수용자가 만들고 재소자가 삽니다. 죄수가 파는 일은 없습니다.

공책은 푸른 수의(囚衣) 컬러입니다. 

디자인도 없이 큰 글씨가 가운데 박혀 있습니다.


A New Life



한 권이 60페이지입니다.

매일 쓰고 있는 일기장이 오늘은 8권 57페이지를 채우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은 성경입니다.

처음부터 읽으면서 공책에 감상들을 적고 있습니다. 성경 노트도 오늘 4권째 53페이지를 적었습니다. 

손으로 공책의 앞, 뒤를 여백 없이 빼곡히 쓰는 일은 태어나 처음 같습니다.


나는 일반 편지지를 구매하지 않고 「항소이유서」를 구매합니다. 

편지지보다 큽니다. 

'항소이유서' 양식이 인쇄된 앞 석 장은 두 번을 접어 잘라서 뒷면을 메모지로 씁니다.

항소할 이유 없는 당신에게는 인쇄된 '항소이유서' 양식이 없는 빈 지면에 매일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성경 노트를 쓰고, 오전, 오후에는 책에 밑줄을 긋습니다.

저녁을 먹고는 일기를 적습니다. 일기에는 오늘 읽은 책들에서 느낀 감상들을 적습니다. 

잠자기 전에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은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힘이 들어서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일을 하면 힘이 난다고 했습니다.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일하지 않는 시간에 파고드는 생각들이 힘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나 또한 당신과 다르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나 봅니다.


나는 안에서 책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앉아서 펜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안에서는

무엇이라도 하는 일로 힘이 납니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로 써서 나를 그려 당신에게 보내는 일의 순서마다 나에게 힘을 주는 일입니다.




매일 쓰는 일에 순번을 정해놓은 것처럼, 내가 읽고 있는 책들도 차례가 정해져 있습니다. 

먼저는 짧은 글(시와 성구), 다음으론 단편(다산과 신영복) 그리고 이어지고 있는 고전(古典)입니다.  


『우리 한시 삼백수』를 매일 하나씩 읽고 있다고 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하루에 하나씩 읽는 게 또 생겼습니다. 

가장 짧습니다. 

하루에 한 줄입니다. 

여운(餘韻)은 며칠이나 갑니다. 



『돌 위에 새긴 생각』입니다. 


원서는 ‘학산당인보’(学山堂印譜)라고 한다네요. 

중국의 옛 명구(名句)들을 뽑아 돌에 새겨 놓은 것들을 모아 만든 책인가 봅니다. 

처음 들어보는 책 이름에서 나는 정말 반가운 이름들을 만났습니다. 

이덕무가 이 책을 발견해 박제가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거의 매일 다산(茶山)과 함께 지낸다는 것을 당신이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다산 때문에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과 친근해져 가고 있습니다. 




혜환 이용휴의 산문집을 읽었었지요. 

글에서도 반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인맥에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성호 이익의 조카였고, 이가환의 아버지였습니다. 

이익은 다산이 태어난 다음 해 생을 다해서 다산은 이익을 생전에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산은 평생의 스승으로 성호 이익을 삼았다고 합니다. 

이가환의 조카가 바로 조선에 천주교를 들여온 이승훈입니다. 

다산이 이승훈의 처남입니다. 

이가환, 이승훈은 다산의 셋째 형 정약종과 함께 순교했지요. 

이런 인맥들로 다산이 그 모진 신유박해 때, 머나먼 강진 유배를 떠나게 된 것입니다. 


정조가 그렇게 갑자기 명을 다하지 않았다면 다산의 유배는 없었을지 모릅니다. 

다산은 정조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들이 서얼 출신의 실학자들이고, 다산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바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입니다. 

그중 최고는 역시 초정 박제가입니다. 

연암 박지원의 문하생이었지요. 

그때의 사람들을 하나씩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감옥에 들어오니 나만 알고 나를 모르는 옛 선인들을 찾나 봅니다.

오늘은 나의 감동을 다 펼치기가 어렵습니다. 



‘학산당인보’(学山堂印譜)에 쓴 박제가의 서문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 총명하지 못한 자는 옛사람의 책을 무덤덤하게 보는 것이 문제다.”


초정의 다음 소개문 하나로 책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글은 짧지만, 의미는 길고, 널리 채집했어도 담긴 뜻은 엄정하다.”     


이덕무와 박제가의 발견만큼 새로운 감동의 에피소드가 담겨있습니다.

이 책의 한글판과 해설을 담아 펴낸 정민 교수는 2012년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에 1년간 머물렀을 때, 그곳 희귀본 서가에서 『학산당인보』의 원본과 마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본 한 장 한 장을 촬영해 옵니다. 

내가 보고 있는 책은 원본 사진들이 찍혀 있습니다. 

그의 평설(評說) 한 문장입니다. 


“한 획 한 획 칼날이 긋고 지나간 자리마다 간난(艱難)과 고민의 한 시절을 살았던 선인들의 열정과 애환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분명히 느낀다.”     


내가 하루에 한 줄 읽는 『돌 위에 새긴 생각』 오늘 편입니다.


“안왕이부득빈천재(安往而不得貧賤哉)-어디 간들 빈천이야 얻지 못하랴”     


정민 교수는 “밑바닥까지 내려갈 걱정이 서면 겁날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감옥에서 이 글을 읽는 이를 겨냥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감옥의 빈천(貧賤)을 넉넉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나는 위 시구 전각 여백에 적어두었습니다.       

   

“바다에 돌을 던진다고 파도치지 않는다.”    

 

“큰비 온다고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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