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절필동 Dec 26. 2023

무분별(無分別)하게 살자

호송 버스는 정거장이 없습니다.

이사를 했습니다.

여기서는 ‘이감’(移監)이라고 합니다.


감옥에서 이사는 공지사항이 아닙니다.


'이감' 소식을 듣고 탈옥도 아닌데 5분 만에 방에서 도망치듯 나왔습니다.

가는 곳을 모르고 있는 곳을 떠나는 이사입니다.


함께 지냈던 낯익은 식구들과 인사도 없이 헤어졌습니다. 

아침 운동시간이었습니다. 

멀리서 서로 눈짓, 손짓만 남기고 떠나왔습니다.

남아 있는 이들은 아직 남아 있을 뿐입니다.


나는 처음이지만 처음 있는 일은 아닙니다.

나처럼 떠난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다음은 알지 못합니다.

수인(囚人)들은 서로가 떠남에 기약(期約)을 두지 않아서입니다.


이감은 감옥을 나가는 출소(出所)가 아닙니다.

이감으로 떠나는 수인의 걸음은 여전히 무거워 보입니다.


밖에서의 이사는 언제나 들뜬 마음이었습니다.

안에서의 이감은 모르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교도소에서 감옥으로 가는 것일지, 수용소로 가는 것일지를 모르는 걱정과 바람이 섞여 있습니다.


가지고 들어온 게 없으니, 가지고 갈 것도 그리 없습니다. 

‘짐이 없으니 한결 가볍다’라는 마음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감옥 안에서는 풀려 있습니다.

감옥을 벗어나면 묶여 있습니다.

수인들은 감옥 안이 좋다고 말합니다.

잠시라도 풀려 있고 싶은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밖으로 나왔지만, 법무부 호송 버스 안에 묶여서 밖을 보았습니다.

사거리에서 좌로, 우로, 직진으로 그리고 거꾸로 달리는 자동차들로 밖의 모습은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호송 버스는 정거장이 없습니다. 


내가 내릴 곳도

당신이 올라탈 곳도 없습니다.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짙은 선팅이 차창 아래를 덮고 있습니다. 법무부의 배려인가 봅니다. 



당신은 겨울이 좋다고 했습니다. 근육질을 보여주는 겨울의 나목(裸木)이 멋지다고 했습니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 

아침에 집을 나서며 오후에 들어와 눈을 치워주겠다던 나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하얬던 나목(裸木)의 가로수들은 온통 푸른 나뭇잎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수인(囚人)은 한순간 나신(裸身)으로 세상에 내몰린 이들입니다. 


나신이 치부(恥部)가 된 것은 원죄의 첫 결과였습니다. 

가죽옷으로 덮어 준 것은 신의 배려일 순 있어도 용서는 아닙니다.     




밖의 모습이 어느 날 갑자기 변한 게 아닌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어제 들어와 오늘 이감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무의 시간만큼 나 또한 안에서 지내온 것이겠지요. 


지나간 시간만큼 지나왔습니다. 


시간은 뒤돌아보면 너무도 빠르고 앞을 보면 너무도 느려 보입니다. 그런 앞날들도 더 지난 훗날에 뒤돌아보는 날엔 너무도 빨리 지나간 날들로 여겨질 것을 압니다. 


당신에게 마지막 보내는 편지에는
“내일은 집에서 보겠습니다”라고 쓸 겁니다.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날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나는 그날에 오늘의 약속을 기억할 겁니다.

기억의 메모리를 덮어쓰는 망각의 처리 속도는 자연의 시간과 같이 가는 듯합니다. 


수인과 가족이 받는 아픔의 처방은 ‘세월이 약’ 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오늘은 남은 생의 첫날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제 때문에 오늘을 살고 있다면, 

내일은 오늘 때문이 될 것입니다. 

알 수 없는 내일이 아닙니다. 

내가 만드는 오늘이 내일이 되는 것임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시절에 따라 나목이 잎들을 내듯이, 나신으로 들어온 수인들은 나름의 잎들을 준비합니다. 

혼자 벌거벗고 있으면 수치이지만 함께 벗고 있으면 가릴 게 없습니다. 

그렇게 새 방으로 들어와 다시 새 식구들을 만났습니다.     




지난 편지에서 ‘둘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나는 서로를 구별 짓는 ‘분별’(分別)의 생각들을 지워 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불가(佛家)에서는 분별하는 게 집착과 번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안에 있는 나와 밖에 있는 당신을 생각하는 ‘분별’은 때마다 번뇌를 부릅니다. 여기 안에서도 나와 다른 모든 ‘분별’들은 때마다 힘들게 한다는 것을 뒤늦게 느끼게 됩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분별심(分別心)을 없애는 일은, 앞서가진 자기 판단이 따라붙는 것을 지우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나의 미추호오(美醜好惡)를 미리 갖지 않고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감옥은 세상과의 분리수용입니다.


여기서도 분리수거를 합니다.

무엇하나 무분별하게 갖거나 버릴 수 없습니다. 

쓰레기도 식별(識別)하고 구별(區別)하여 선별(選別)하는 일입니다.


분별심을 없애는 일이 쓰레기 분리수거는 아닙니다.

옆에 누운 수인(囚人)을, 수의(囚衣)를 입은 내 모습을 보며 ‘쓰레기 같은 놈’으로 분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알아들었습니다.


“무분별(無分別)하게 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날 밖에서는 언제나 ‘분별없이 살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는 안에서, 오히려 ‘분별없이 살자, 무분별하게 살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말이 장난 같습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하면 매우 높은 수행의 깨침에서 나온 말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지도무난(至道無難)-지극한 도는 어려운 게 아니다.

유혐간택(唯嫌揀擇)-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라고 했나 봅니다.


분별과 무분별에서 간택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순간, ‘간택(揀擇)하지 말라’는 말씀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산(茶山)이 했던 말입니다. 

“이전에 달게 먹던 것을 지금은 쓰다고 뱉는다. 사람은 이익에 따라 교묘히 바뀐다.”     


감옥에서 실은 간택할 게 그리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전 09화 아! 김승희, 상처의 용수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