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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Dec 22. 2023

노인과 바다

식구(食口)

가족을 떠나왔는데 이곳에도 식구(食口)는 있습니다.


혼자 떨어져 나와 방 하나에서 24시간을 함께 생활하는 남자들입니다.

태어나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서는 처음입니다.


감옥의 좁은 방에서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는 데는 옆 사람의 체온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감옥에 들어오는 신입은 여름보다는 겨울에 더 환영(?)을 받는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 듯합니다.




처음 식구들을 만났던 날이 잊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긴 곳일까에 대한 궁금보다는 어떤 사람들일까를 먼저 걱정했었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일지 신고를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곳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당신의 걱정을 덜고 싶어서 자세한 기억들을 적어두었습니다.

이제는 그날의 세세함을 전하려는 나의 안내는 나만의 기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방에 들어온 순서대로 좁은 방에서도 각자의 자리는 정해집니다.

한 달이 넘었다는 사람이 가장 오래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한 달’이라는 세월을 ‘첫날’에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먼저 나간다 법은 없습니다.     



S는 이제 스무 살을 갓 넘은 청년입니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보더니 자기도 책을 읽고 싶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 추천해 주었던 책들이 들어왔습니다.


『데미안』, 『노인과 바다』, 『어린 왕자』입니다.


어느 것부터 읽을지를 주저하더니 내게 물었습니다.

나도 머뭇거렸습니다.

한 방 식구들이 모였습니다.

순위를 정하는데 모두가 어려웠습니다.


“사다리 타라”고 누군가 제안을 했습니다.

 S는 『노인과 바다』를 집어 들었습니다.


“데미안? 이건 뭔 말인지 모르겠고…,

어린 왕자. 왕자? 나하고는 상관없는 것 같고….

그래, 노인과 바다다.

에휴, 할아버지 생각나네….”


“우리 할아버지 섬에 살아요.”

『노인과 바다』를 내게 보이며 S가 말했습니다.

나름, 선택의 이유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는 홀로 조각배를 타고서 낚시하는 노인이었다.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날이 이제 84일이었다.”     


S가 『노인과 바다』를 집어 들고 벽에 기대어 앉더니 첫 문장을 소리 내 읽었습니다.


“노인네 재수 없기는 나랑 똑같네….”

우리 방에 제일 먼저 들어온 L이 말했습니다.


“어르신한테 노인, 노인 그러지 마….”

우리 방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K가 말했습니다.

“그럼 나는 이거나 읽을까?”

K는 『어린 왕자』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습니다.


“너도 읽어”

L이 남아 있는 『데미안』을 우리 방에서 키가 제일 큰 Y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갑자기 우리 방이 도서관이 되었습니다.

나도 다시 읽던 책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잠시 후, TV가 켜졌습니다.

모두의 눈은 TV로 쏠려 있었습니다.


S만 혼자 『노인과 바다』를 조용히 읽고 있었습니다.     


https://youtu.be/sO7Y8jVVGTQ?si=IrxLP4b6wuKr-FN3

갑자기 진한 커피 생각이 났습니다.

「자클린의 눈물」 첼로 선율이 듣고 싶어 졌습니다.

아니, 방 식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전국 감옥에서 들려진다면 아마도 모두 숨죽여 흐느낄지도 모릅니다.    


방 식구들 누구나 편지와 접견을 기다리는 마음은 다 같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편지와 접견이 모두에게 오지는 않습니다.

기다리지 않는 이들의 속을 알 수는 없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편해 보였습니다.

당신에게서 매일 편지를 받으면서 방 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나에게는 새로운 기다림이 생겼습니다.

금주에는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 『나무야 나무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찾았던 책이 다산의 글들과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지요.

예전에 읽었던 책이었지만, 이번에 처음 읽는 것 같았습니다.

이전에는 생소했던 감옥의 용어들도 친근(?)하게 다가왔답니다.

선생님의 책들을 다시 처음부터 읽으려고 합니다.

선생님이 출소 후, 세계 여러 나라와 국내 곳곳을 다니시며 쓰셨던 글들이었지요.

수감되고 출소를 꿈꾸는 것은 첫날부터였습니다.

이미 내 마음은 옥담을 넘어가 있습니다.

나는 여기 갇혀서 자유로운 마음의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수도원과 불교 선방(禪房)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낮술’은 ‘낮’에 마시는 술이 아니라, ‘낮부터’ 마시는 술이라 했었지요.

‘고전(古典)’은 ‘옛날 책’이 아니라, ‘옛날부터’ 읽어오는 책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스에서 인도를 거쳐 중국을 오고 가는 책 여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미리부터 먼 여행 일정을 잡아 놓는 것 같아 한편으론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렇습니다.     


S가 『노인과 바다』를 다 읽고 나면,


나도 다시 노인을 따라 바다로 나가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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