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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Dec 22. 2023

아! 김승희, 상처의 용수철…

“내 옆구리를 찌른 장대창을 나에게 다오”

당신을 처음 만난 날 당신의 손에는 김승희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이 들려있었습니다.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타는’ 주점에는 김추자의 ‘커피 한 잔’의 레코드판이 직직거리며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늘 앉는다는 단골 구석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당신은 단골이라 안주를 주문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빈속에 안주도 없이 차디찬 소주잔을 한 잔씩 비울 때마다, 당신은 김승희의 시(詩)를 하나씩 독백하듯 들려주었습니다. 


지금은 그의 시 한 소절을 다 외우지 못하지만, 희미한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것이 있습니다.     


“삶이 시작되는 곳에는 늘 언제나 벼랑이 있지, 눈먼 사랑, 치렁치렁 흘러가는 유황의 죽음의 물… 말해봐, 촛불아, 누가 저 태양의 바라를 흔드는지…”     


“이보다 더한 안주가 없지…”     


당신은 한 잔 비우면 시 한 수를 읽고 말했었지요. 

그날의 당신의 모습을 훗날 아이들과 함께 술잔을 나눌 때 자주 들려주곤 했었지요.      




나는 당신에게 ‘눈먼 사랑’이 되어갔습니다.

당신은 가운데 가르마를 탄 짙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검정 폴라에 검정 코트를 자주 입었지요. 


당신의 첫 모습에서 나는 ‘나나 무스꾸리’를 떠올렸습니다. 

당신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엔 “Over and over I kiss you again…”을 혼자 흥얼거렸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당신에게서 지금까지 노래 한 곡을 끝까지 부르는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이후로도 우리는 언제나 김승희, 최승자, 곽재구, 황지우… 를 안주 대신으로 취해갔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나는 당신을 ‘검은 시인’이라고 내 일기에 적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리스 비극(悲劇)에 관한 한 철학자의 글을 읽는데 거기서 김승희의 시(詩)를 보게 된 것입니다.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 뭉그러진 나비 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조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     


철학자는 그리스 비극에 담겨있는 고통의 승화(昇華)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냈습니다. 

그러다가 김승희를 끄집어낸 것입니다.


‘김승희’ 이름 하나 때문에 그리스 비극에 대한 장구한 문장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승희의 연작시 「솟구쳐 오르기」에 나오는 단편들을 옮겨 적습니다.


...
상처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데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처의 장대 높이 뛰기를 하는
존재의 곡예만큼
장엄한 것이 있을까?
...
홀로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을 때
모든 것은 아프고 아프다
모든 존재는 아프고
아픈 것은 나쁜 것을 뛰어넘지 못할 때
꿈은 사악해지기도 하더라
내 옆구리를 찌른 장대창을 나에게
다오,
그것을 쥐고 하늘 높이
뛰어올라
황금의 별을 만지리라,
혼 속에 있는 고통이여
혼돈 속에 있는 황금의 별이여 


아, 내가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상처는 ‘용수철’이어서 ‘솟구쳐 오르’는 것이라는 문장 하나가 내 가슴의 바닥을 깨진 사기그릇으로 박박 긁는 것 같습니다. 

울컥하며 들썩이는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런 누름이 더 튀어 오를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벽과 담이 사방으로 나를 둘러 서 있습니다. 

넘을 수 없는 높이는 탈옥을 생각지 못하게 합니다. 


수인(囚人)은 옥담을 넘을 수 있는 장대를 가진 높이 뛰기 선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김승희는 “상처의 장대 높이 뛰기를 하는 존재의 곡예”는 “장엄”(莊嚴)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내 옆구리를 찌른 장대창”으로 “하늘 높이 뛰어올라 황금의 별을 만지리라”라고 노래합니다.     


내 아픔과 고통의 상처, 

내 폐부를 깊숙이 찔러 넣은 창을 장대로 삼아 저 옥담을 뛰어넘는 탈옥을 꿈꾸라고 합니다. 




상처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있는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용수철이 되어 솟구쳐 오르는 꿈을 꾸게 합니다.     



“아픈 것은 나쁜 것을 뛰어넘지 못할 때 꿈은 사악해지기도” 한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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