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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Dec 27. 2023

감아야 보이는

느린 소통, 빠른 불통

감옥은 독서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수인(囚人)을 보지 못했습니다.

‘정숙’이란 딱지를 붙일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책의 종류는 갖가지입니다. 독서 시간도 제각각입니다.

 

감옥이 도서관은 아닙니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는 없습니다.

밖에서는 책 볼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독서가 다른 일에 순위가 밀려서입니다.

안에서는 독서가 다른 일에 밀릴 순위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감옥이 독서의 최적화된 곳일 듯합니다.

책을 읽기 위해 감옥에 올 사람이 없는 것을 모르진 않습니다.


“고전(古典)은 누구나 아는 책이면서, 누구도 읽지 않는 책이다”라는 말은 나를 두고 했던 말 같습니다. 


전에는 ‘남’에게 ‘나’를 보이려고 읽었던 책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남은 없고 나만 있습니다. 



이제야 ‘나’만 읽는 책은, ‘나’에게만 보이려는 책이 됐습니다. 

남에게 설명할 이유가 없으니, 

남아 있는 남은 없고, 

홀로 남은 나만 이해하고 깨닫는 일만 남았습니다. 


나만 혼자라는 생각은 당신의 걱정일 듯 합니다. 

혼자 읽는 책이 아니려고 당신에게 편지로 전하는 일이 됐습니다.     




당신은 영치금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 푼도 벌지 못하게 된 처지에 무엇 하나 구매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당신은 밖에서도 알 수가 있나 봅니다. 

가격도 확인하지 않고 카드만 내밀었던 내가 변했습니다. 여기서는 10원 100원의 가격들로 싸다, 비싸다를 체감합니다.


이곳에 와서 책 구매의 원칙 하나를 세웠습니다. 

한 번 읽을 책은 제외하자는 것입니다. 

아이가 더운 여름날 녹아내리는 아이스께끼를 급히 깨물어 먹지 않고 핥는 마음을 뒤늦게 배웁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고전(古典)입니다. 

너무도 잘 안다고 했던 책들이지만, 

끝까지 읽어보지 못했던 책들, 

해설로 읽고 원서를 피해 갔던 책들, 

이제야 그 책을 읽느냐는 시선을 피하려고 감히 내놓고 들고 다니지 못했던 책들, 

읽었어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책들…입니다. 




혜환 이용휴의 산문집을 읽었다고 했지요. 

사전에 그를 알아서 구매했던 게 아닙니다.

책의 제목 『나를 찾는 길-찾아가는 길』 때문이었습니다. 

제목만 보고 당신은 더 마음이 아팠을지 모릅니다. 

위로의 마음으로 글 하나 전합니다.     


이응훈이라는 젊은 선비가 요절했답니다. 그의 시집에 혜환이 찬사(讚辭)의 글을 남겼답니다.


군지유고(君之遺孤) 타일사욕견군(他日思欲見君)

군(이응훈)의 자식이 훗날에 군(아버지)을 그리워하여 보고자 한다면,

불필문기모(不必問其母) 직심우차권(直尋于此卷) 가의(可矣)

굳이 어머니에게 물을 필요 없이, 직접 이 시집에서 찾으면 될 것이다.     


혜환은 이응훈을 가리켜, “그는 곧 그의 시(詩)와 같다-人如其詩”고 까지 극찬합니다. 

내가 이응훈을 모르는 것은 그의 글을 읽어보지도 못했고, 읽는다 해도 혜환의 평(評)에 대한 이해도 짧을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혜환의 글을 전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 입니다.    

 

22세에 요절한 이응훈이라는 선비가 바로 혜환의 사위라는 겁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자식들이 장성한 후에 아버지가 그리워 알고자 한다면, 어머니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아버지가 남긴 시집을 보면 된다고 했던 혜환의 말은 바로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남긴 것입니다.     



아버님 임종 전날이 떠올랐습니다.


손주들을 불러서 귀에 대고 마지막 숨소리에 당신의 아들 자랑을 남기셨다고 했습니다. 

혜환의 글에서 아버님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굳이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관해 물을 것도 없는 아이들입니다. 

당신은 아이들이 든든하다고 했습니다. 

나 없는 자리에서 내 이야기들로 웃는다고 했습니다. 

전해 듣는 나는 미소 지으며 눈물을 삼킵니다.     


“가치가 있는 일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토마스 기르스트, 『세상의 모든 시간-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 책 뒤표지 첫 줄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가수이면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음유시인 밥딜런이 한 말이라고 전합니다. 


지름길이 아닌 돌아가는 길, 그 길에서 마주친 ‘뜻밖의 즐거움’을 Serendipity라고 하지요. 

‘행운’(幸運)은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라, ‘빠름’을 놓아주고 ‘느림’을 찾은 데에서 발견하나 봅니다.


저자는 ‘오랜 시간의 힘’을 보여주는 여러 이야기를 취재하듯이 보여줍니다. 

작은 책의 여백들에 나의 마음들을 적어놓았습니다. 


내가 읽고 곁에 두지 않는 책들을 당신에게 보내면, 당신은 책 보다 여백에 빼곡히 적혀있는 나의 글들을 먼저 읽어보려고 할 것 같습니다. 하여 편지에는 모두를 옮겨 적지는 않겠습니다.     

첫 장을 넘기면 내가 제일 먼저 적어놓은 글은 나에게 한 물음입니다.


“나의 수감(收監)의 가치는 얼마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가?”     


책을 다 읽으면 책의 첫 장 여백에 짧은 나의 단상(斷想)을 적어 놓던 버릇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책 제목만 보고 급하게 구매용지를 채웠던 기대가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느림’에 대한

기대가 ‘빨랐’던가

아니면

이미 ‘느림’에 대한

동(東)·서(西)의 시차(時差)가 컸던가     

노자와 장자의

걸음에 맞춰 걷다 보니

백인들의 걸음은 여전히 빠르다     

‘느림’은

‘장시간’, ‘장기간’이 아니다     

갇혀서

시간을 재촉하려는 순간마다

조급한 불안을 잠재우는 다독거림은

‘느림’뿐이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나, 밖에 있는 가족이나, 그 누구도 바라는 것의 제일 순위는 ‘시간이 빨리 가는 것’ 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필요로’하는 가치를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재촉한다고 해서 시간이 빨리 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이도 없습니다.


원치 않게 당신과 ‘느린’ 소통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문자에 답을 잠시라도 기다리지 못하는 시대를 살다 왔습니다. 


오늘 내가 쓰는 편지를 당신은 다음 주에나 받습니다. 

어제 당신이 쓴 인터넷 서신은 오늘 내가 받습니다. 

당신의 서신과 나의 편지 간의 시차로 답답한 상황보다는 웃는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느림’의 지체가 주는 불평보다는 ‘빠름’의 불통이 가져다주는 작은 웃음들이 있습니다. 

‘돌아가다 만나는 뜻밖의 즐거움’ 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빠름’과 ‘느림’의 대조는 상대적입니다. 

천천히 걸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고, 

걸음을 멈추고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고, 

시간을 멈추고 눈을 감고 마음으로만 보아야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옆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고, 

안아보지 않아도 보이는 당신이 있습니다.     


감옥에서는 밖을 볼 수 없습니다.

감옥에서는 안을 볼 수 있습니다.

밖에서는 눈을 떠야 봅니다. 빨리 볼 수 있습니다.

안에서는 시야가 사방 벽을 넘지 못합니다.

감옥은 눈을 감게 합니다.

감으면 보입니다. 느리게, 천천히 보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당신도

감옥은 내 안을 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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