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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Jan 08. 2025

수레바퀴


당신은 나목(裸木)의 근육질이 멋지다고 했습니다. 

한겨울 계곡물을 마시며 나목의 수액으로 링거를 맞는 것이라 했지요. 

눈도 녹지 않았는데 마르지 않는 계곡물은 흰 눈을 덮어쓴 나무가 얼지 않으려 수액을 뽑아내는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겨울이 다가온 것을 코끝으로 맡을 때는 늦가을의 옅은 수채화 같다며 미소 짓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나는 한여름의 계곡이 좋다고 했지요. 

폭염을 피하는 계곡보다는 폭우 속의 계곡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장마 예보를 들으면 무거운 박 짐을 꾸렸던 날들이 모락거립니다.


“요즘 내가 제일 힘든 게 고운 단풍과 지는 낙엽이에요. 왠지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해요.” 


오늘 받아본 당신의 편지 첫 줄을 옮기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예전엔 당신이 좋아했던 것이, 이제는 힘든 일이 됐다는 당신의 변한 마음을 읽어서 그렇습니다. 

지난밤 몰래 길에 떨어진 낙엽을 새벽 찬 바람이 쓸고 가듯 가슴이 차갑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은 희망이 되기도 하고 불안과 두려움의 징조이기도 합니다. 

오늘이 어제의 결과임을 인정한다면, 내일은 오늘이 원인임을 아는 일을 매일 잊지 않으려 합니다. 

‘지금’이 지나감을 아는 일은, 지나갈 ‘지금’ 다음을 ‘지금’ 알아채야 합니다. 

‘지금’을 알면 ‘내일’의 불안을 지울 수 있다는 확신으로 찬 바람에 이를 꼭 물어봅니다. 

나의 ‘지금’을 알아보려고 어제로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입을 닫고 눈을 감으며 ‘지금’을 읽는 중입니다.     



무엇을 하고 있소?

좌선하고 있소.

좌선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오?

부처가 되려고 하오. 

 

남악이 묻고 마조가 답합니다. 

나는 한 스님이 묻고 한 스님이 답하는 것 그 이상을 그리지는 못합니다.

남악은 다음 날 기왓장 하나를 가져와 마조 옆에 앉아서 그것을 갑니다. 

마조가 묻고 남악이 답합니다.   


무엇을 하고 있소?

기왓장을 갈고 있소.

갈아서 무엇을 하려 하오?

거울을 만들려고 하오.

기왓장을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되겠소?

좌선한다고 어찌 부처가 되겠소?

그러면 어찌해야 부처가 되겠소?

수레바퀴에 채찍질한다 해서 수레가 가겠소?     


나는 아직 하나를 읽고 둘을 알지는 못합니다. 

하나마다 해설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누구도 수레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수레바퀴에 채찍질하지 않을 것을 모르진 않습니다. 

수레를 끄는 게 수레바퀴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비유로 쓰인 ‘수레바퀴’와 ‘수레’에 눈이 갔습니다. 

‘비유’를 그리스어로 ‘파라볼레’라고 합니다. 

직접 주는 게 아니라, 옆에(파라) 던져서(볼레) 줍게 한다는 뜻입니다. 

‘수레바퀴’를 옆에 던진 의미를 혼자 찾습니다.


불가(佛家)에서 어쩌면 가장 친숙한 글자가 ‘승(僧)’자일 것 같습니다. 

스님을 ‘승려’라고 하고, 비구승, 비구니승, 출가 스님들이 함께 공동체로 사는 모임을 승가(僧伽)라고 하지요.

우리말 음(音)은 같지만, 대승불교, 소승불교를 말할 때, 쓴 ‘승’ 자는 올라타는 ‘수레’ 승(乘)입니다. 

불교가 ‘수레’에 올라타는(乘) 의미라면, 어느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수단일 겁니다. 

수레바퀴처럼 깨달음이 돌고 돌면서 피안에 이르는 것인가 봅니다.

원형의 수레바퀴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뜻도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설법을 ‘법륜(法輪)’이라고 한다지요. 

여기 바퀴, 수레바퀴를 뜻하는 ‘륜(輪)’을 쓴 것을 보면 수레바퀴의 비유는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法)이 바퀴처럼 굴러가며 모든 곳에 두루 미치는 것이겠지요. 

바퀴는 회전입니다. 

회전은 니체의 영원회귀를 떠오르게도 합니다.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는 해탈의 수레에 올라타는 일인 것 같습니다.


불교가 마음의 종교라고 하지요. 

흔들리고 이리저리 변하는 마음을 찾지 말고, 심연의 고요한 불변의 불성인 참나의 마음을 바라보라는 글들을 많이 읽은 듯합니다. 

읽으면서 그 뜻을 다 알진 못한다 해도 고개를 끄덕이곤 했습니다. 


그러다 윗글(남악과 마조의 이야기)을 읽고,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수레바퀴를 불성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수레를 앞으로, 옆으로 그리고 뒤로라도 움직일 수 있는, 그렇게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는 마음을 다스릴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좌선으로 마음을 잡아두는게 아닙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도 아닌것 같습니다.

흔들림을 흔들거리며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해 보입니다.

자기 각성과 성찰을 위해 기왓장을 갈고 있던 내 모습을 본 듯합니다.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이라해서 흔들리지 않는 그물은 아닐 겁니다.

이야기의 본뜻엔 소승불교가 대승불교로 나아가야 하는 속내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잎이 떨어져도, 새로 싹이 돋아도 흔들리지 않는 심연의 마음을 찾는 좌선을 권하려던 입을 닫습니다. 

색색으로 물드는 단풍에서도 아픈 마음을 갖게 되고, 찬 바람에 떨어져 바닥에 구르는 낙엽에서도 서글픈 마음을 갖는 것에 나마저 고개를 떨구지 않을 마음이 일었습니다. 

흔들리면 흔들리라고 권합니다. 

출렁이는 물결을 타고 넘는 흔들리는 마음을 탓하지 않습니다. 

연기의 조건에 따라 때마다 변해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깊은 고요의 움직이지 않는 심연을 찾을 고집을 버리고, 출렁이는 표면에서 물결처럼 일어나고 가라앉는 마음을 마음대로 두라고 하고 싶습니다. 

움직이는 변화에 올라타서(乘) 덜컹대는 움직임이 더하도록 채찍질이 더욱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기왓장도 갈면 거울이 된다는 포기하지 않을 의지의 좌선만을 고집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풀은 바람이 불면 눕고 바람이 그치면 일어난다지요. 

채찍질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먼저 일어남을 위한 것 같습니다. 


“왠지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이는 당신은,

이미 흔들리는 수레에 올라타 있는지도 모릅니다.


흔들리는 당신을 멀리 두고

혼자 옥담을 넘지 못하는 수레바퀴를 탓할 일이 아닌 것을 가슴에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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