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모서리

by 만절필동

시체를 어디에 두었지?

흙에다 합쳐놨지. 서로 친척뻘 되니까.


오! 햄릿, 넌 내 가슴을 두 동강을 내놓는구나!

오! 어머니, 나쁜 쪽은 내버리고, 나머지 반쪽으로 더 순수하게 사십시오.


바람이 없는 곳으로 가실까요?

내 무덤으로?


<햄릿>을 읽었습니다.

극의 내용보다 극본의 대사들에서 감동이 큽니다.

감동을 준 문장들을 당신에게 옮기려다 그만두었습니다.

고르는 게 쉽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어느 대목에서 하는 말인지를 모두 설명하느니, 한 권 보내는 게 낫겠습니다.

말이 시(詩)가 되려면, ‘할 때’가 아니라, ‘쓸 때’입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시(詩)를 말(대사)로 합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쓰지!’

시(詩)를 읽을 때 드는 감동은 질문보다 감탄이 앞설 때입니다.

감탄이 없는 시(詩)는 질문이 쌓일 때입니다.

질문은 감동을 막는 걸림돌입니다.

나에게 어려운 시(詩)는 질문을 남기고, 쉬운 시(詩)는 감동을 남깁니다.

<햄릿>을 책으로 읽지 않고 객석에서 듣는다면 어떨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시어(詩語)와 시구(詩句)로 일상의 대화가 가능할까요? 말장난이라 할까요?


<햄릿>하면, 다 읽지 않은 이들도 “To be, or not to be”는 압니다.

우리말로 아는 이들은 ‘죽느냐 사느냐’로 회자합니다.

원문은 ‘사느냐 죽느냐’ 순서지요.

워낙 우리말엔 ‘죽겠다’가 앞서서 일 겁니다.

힘들어 죽겠다. 좋아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그것이 문제다, that is the question’의 명제는, <or>가 둘 중 하나의 선택을 두고 갈등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 해도 그것대로 문제는 여전히 남는 것이겠지요.

살까 죽을까의 갈림길에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도, 죽어도 각각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or>가 아니라 <and>입니다.

‘To be, and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To be, that is the question, and yet, not to be, that is also the question.)입니다.


햄릿 연인의 아버지이고, 결국 햄릿의 손에 죽임을 당한 폴로니어스가 햄릿과 대화를 나누다 “바람이 없는 곳으로” 자리옮기자고 권하자, “내 무덤으로?”라고 햄릿이 답을 하지요. 정태춘의 ‘사망부가’ 자리가 떠올랐습니다. ‘바람 모서리’ 입니다.


‘저 산꼭대기 아버지 무덤 거친 베옷 입고 누우신 그 바람 모서리….’


그의 모든 노래는 시(詩)입니다.

그리고 시화(詩畫)입니다.

혈연도 없고, 번지수도 모르는 그곳을 노래 따라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람 모서리… 인적 없는 민둥산… 갯벌 향해 뻗으신… 저 산꼭대기… 길도 없는 언덕배기… 싸늘한 달빛만 내리비칠… 작은 비석도 없는” 그곳을,

노랫길 따르면,

“이승에서 못다 하신 그 말씀 들으러 잔 부으러” 다다를 것 같습니다.



‘지구별 여행자’ 시인 류시화는 인도기행의 문을 열며,

“매 순간을 춤추라. 그것이 여행이 내게 가르쳐 준 생의 방식이었다. 바람을 춤추라. 온 존재로 매 순간을 느끼며 생을 춤추라...” 라고 합니다.


춤은 움직임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의 몸짓입니다.

잎이 떨어지는 것은 나무의 생명이 다해서가 아닙니다.

낙엽은 바람에 춤을 춥니다.

춤바람은 춤이 바람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바람이 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바람이 생명입니다.

그러니 “바람 없는 곳으로” 가자는 말에, 햄릿은 자신을 죽이려는 속내를 알아채고, “나의 무덤으로?”라고 대꾸한 것입니다.


매일 저녁 집에 가지 못하는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당신과 ‘말’을 주고받은 지 오랩니다.

매일 보내는 편지가, ‘하는 말’보다 ‘쓰는 글’이 감탄을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말’로 전하지 못하는 처지는 감탄이 되지 못해 버리는 글들이 많습니다.


노자(老子)는 “知者不言(지자불언)하고 言者不知(언자부지) 니라”라고 했습니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고 했지요.

장자(莊子)도 “言者所以在意(언자소이재의) 하니, 得意而忘言(득의이망언) 이라, 말은 뜻을 전하는 데 있으니, 뜻을 얻고 나면 말은 잊어라”라고 했습니다.

금강경(金剛經)에는 "說法者(설법자)는 無法可說(무법가설) 일새, 是名說法(시명설법)이니라, 진정 법을 설한다는 것은 가히 설할 만한 법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그래서 그 이름만을 설법이라."라고 합니다.


말을 다 끊지는 못해도, 늘릴 일이 없는 이곳입니다.

묵언(默言)의 수행처는 아니어도, 무언(無言)으로 수심(修心) 해야 할 자리임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당신에게 길고 긴말이 쌓여도, 해가지면 까맣게 잊힙니다.

말이 끊기지 않는 사람을 말 잘한다고 합니다.

시작하면 끝이 있는 유한의 세상입니다.

끝없는 말은, 시작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 지극한 말(至言)은 침묵(沈默) 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당신에게 전하지 못하는 말을 지극한 침묵으로 편지에 담을 수 없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나의 급한 입을 순간 다물게 합니다.

“피가 끓을 때면 영혼이 얼마나 아낌없이 혀에게 맹세를 빌려주는지….”


며칠 전 도스토옙스키가 내게 했던 말/글이었기도 합니다.

“음, 그렇다! 인간의 힘으로 못할 일은 하나도 없는데, 다만 겁이 나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이다. 이건 절대적인 진리지. 그런데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새로운 한 걸음, 새로운 자기 자신의 말!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지….”


당신에게 말을 전하지 못해도, 편지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전할 수 있을까요?

혼자 말은 없는데,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많아집니다.

전할 수 없는 말이어서 글에서도 말이 지언(至言)이 되어야 할 텐데,


내 편지가 시(詩)가 되지 못하는 것은 내 탓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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