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

by 만절필동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

누구의 말인지 기억엔 없지만, 오늘 종일 떠오른 문장입니다.

피부는 몸의 가장 바깥 표면입니다.

가장 표면적인 것이 가장 깊은 것이라는 의미를 종일 찾았습니다.


속임과 위선의 부정한 모습을 ‘속과 겉이 다르다’라고 합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속과 겉이 다르다면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겉만 보고 섣부른 단정을 주의하라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표면에 관한 판단은 피상적 사유일 수 있습니다.


'피부가 가장 깊다'는 사유는 겉만 보고서도 가장 깊은 사유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장 깊은 것이 가장 바깥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라면, 속과 겉이 다를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속은 겉을 보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속과 겉이 다르다’는 판단은 이미 속을 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속을 알아야 겉을 판단하는 일입니다.

겉은 보이지만 속은 숨겨져 있습니다.

속이 겉에 드러나야 겉을 보고서 속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제야 '가장 깊은 것이 피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라야 겉과 속이 다르지 않습니다.

겉을 꾸미는 것 또한 속을 다스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합니다.

물의 깊이는 잴 수 있다지만, 사람 속을 잴 도리가 없다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반드시 부정적이지만은 않을 듯도 합니다.

알 수 없는 사람 속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계곡과 강, 바다 표면의 색이 다른 것은 저마다의 깊이가 달라서입니다.

다른 색은 서로 다른 자기만의 깊이를 표면에 드러낸 것입니다.

물은 가장 깊은 것이 피부가 됩니다.


당신과 처음 설악에 들었던 밤에 계곡의 맑은 소(沼)에서 보름달 두 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계곡의 물웅덩이 바닥에 하나, 그리고 소(沼) 물 위에 하나 떠 있었지요.

속과 겉이 다르지 않았던 건 계곡물이 맑아서였습니다.

계곡물 위에 떠 있던 보름달이 물길을 뚫고 바닥까지 들어간 것인지, 바닥에 들어갔다 튕겨 물 위로 떠 오른 것인지 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늘에 걸린 보름달을 물 위에서 하나 그리고 물 바닥에서 하나 그렇게 같은 보름달 세 개를 본 적이 처음이었습니다.


사람도 저마다 깊이가 다릅니다.

사람마다 다른 체구라 해서 그 속의 깊이가 차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높은 평가는 깊이에 비례하곤 합니다.

‘속이 깊다’입니다.

알 수 없는 한 길 사람 속이라도 ‘깊다’고 평하는 것은 그의 속 깊은 마음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가장 깊은 것이 피부입니다.


감옥에 있는 수인(囚人)은 푸른 수의(囚衣)를 입은 이들입니다.

모두가 같은 색으로 겉옷을 걸쳤습니다.

하나의 집단 표면을 가진 이들입니다.

겉옷 하나로 재소자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재소자는 겉과 속이 같은 이들이 됩니다.

밖에서는 그랬습니다.


안에서 같은 색의 겉옷을 걸쳤지만 저마다 다른 속내들을 갖고 있음을 봅니다.

안에 있는 재소자들도 저마다 깊이가 다릅니다.

밖에서는 푸른 수의(囚衣)만 봅니다.

안에서는 푸른 수의(囚衣)가 덮고 있는 재소자들의 피부를 보고 부대낄 수 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이어서 이곳으로 들어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나는 안에서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을 다시 보게 됩니다.

밖에서 본 겉과, 안에서 본 속이 다른 것을 다시 보게 됩니다.


표면에서 깊이의 존재를 더듬는 사유(思惟)는 벽을 뚫지 못하고 담을 넘지 못합니다.

아니,

표면에서 깊이의 존재를 더듬어야 벽을 뚫고 담을 넘을지도 모릅니다.


얼마 만인지 당신을 품에 안고 있다 눈을 떴습니다.

청년이 내 팔베개를 하고 내 품에 안겨 있습니다.

좁은 감방 안에서 추위를 피하려는 몸짓은 옆 사람의 체온에 기대게 합니다.

감옥은 몸을 가두어 놓은 곳입니다.

몸이 갇히면 마음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을 자주 봅니다.

마음도 추위를 타지만 녹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음보다 먼저 움직이는 게 몸인 듯합니다.

창살이 영하의 온도계 수은기둥처럼 보입니다.

재소자들은 잘 때만 푸른 수의(囚衣)를 벗습니다.

밤새 ‘가장 깊은 피부’를 드러냅니다.


창살 밖은 영하인데 재소자들의 ‘가장 깊은 피부’는 영상 36도를 넘습니다.

웅크려 내 품에 안긴 청년에게서 나도 몸과 마음을 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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