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 아모림과 팬텀 스레드

아모림이 경질되었다.

by 단짠

새벽에 맨유 경기가 있어서 일찍 눈이 떠졌다. 어쩌면 잠을 설쳤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안식처인 선호 방 침대에 누워 선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화면 밝기는 최소화하여 핸드폰을 보다가 경기 시작 즈음 서재방으로 와서 노트북을 켜고 경기를 본다.

경기 결과는 2:2 무승부.

아모림 감독이 경질되고, 대런 플레쳐 임시 감독이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은 경기다.

과거 맨유가 유럽의 최고 엘리트 클럽이던 시절의 시원시원한 느낌이 되살아 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경기였다. 물론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말이다.


아모림 감독의 경질은,

온전한 믿음-어쩌면 비합리적인-을 원하는 자와 계산된 믿음-어쩌면 합리적인-을 주려는 자 사이의 갈등이 폭발한 결과였다.

회사 생활도 마찬가지고, 연인 관계, 부모-자식 관계도 마찬가지다. (아니다. 부모-자식 관계는 아래에 이어지는 내용과는 결이 다르니 여기서는 제외하는 것이 맞겠다.)


무한한 믿음이 먼저인가, 아니면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 입증이 먼저인가.

이제 유럽 축구 무대는 상업적 성과 또는 슈가대디가 없이는 엘리트 그룹으로 진입할 수 없고, 유지하기도 어렵다.

즉, ‘경영’이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럼에도,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스포츠- 하얀 공, 빠른 움직임, 진로를 방해하는 존재, 그물, 골!-인 축구는, 순수한 열정을 요구하는 관중과, 감독과, 선수들이 있다.

그러다 보니 순수한 열정과 무한한 믿음을 요구하는 무리와, 합리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난 이 문구에 어떠한 부정적 의미도 담지 않았다.-무리가 충돌한다.

전자가 옳은 경우-보다 명확히 말하면, 훗날 전자가 옳았으려냐? 또는 전자가 옳았었구나!라는 정도의 확인의 의미-에는 상대방에게 불신의 죄에 대한 처벌-예를 들면, 자진 사퇴, 퇴사, 이별 통보 등의 형식-이 따를 것이고, 후자가 옳은 경우-보다 명확히 말하면, 훗날 후자가 옳았으려냐? 또는 후자가 옳았었구나!라는 정도의 확인의 의미-에는 돈/성적은 예상가능한 범주에서 보호하였지만 결국 좌절한 인간이 남는다. 그리고는 이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월급을 받으며 일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종종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일까.

나는 루벤 아모림 감독이 경질되었을 때, 애석한 마음이 들었다.

본인의 아이디어를 믿어주지 않는-물론 아모림의 관점- 랫클리프 사단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랫클리프 사단은 의심이 아닌 합리적인 피드백을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아모림에게 불만이었을 것이다.

부싯돌이 여러 번 부딪치면 불꽃이 불이 되듯, 아마도 며칠 전에는 그 불이 붙어 외부를 밝게 비추었을 것이다.


스타트업 사내 변호사로 처음 입사한 후, 법을 모르는 구성원들에게 끊임없는 챌린지를 받던 시절이 떠오른다.

나의 자문 결과에 대해 외부 비전문가 또는 전문가의 자문을 받고, 그 결과를 여과 없이 나에게 전달하며, 다시 한번 자문을 하라는 과정이 반복되던 시절이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다.

자존심과 시간을 잃었고, (매우 예외적으로) 논의가 풍성해졌다. 자문 결과가 달라졌던 적은 딱히 기억에 없다.


4년이 지난 지금은 이런 고난이 거의 없다.

어쩌면 입증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불신의 죄를 다루었다면(이 작품에서의 배신자는 장태수(한석규 역)다.), <팬텀 스레드>는 자기파괴적으로 보이는 무한한 믿음을 다루었다.

나에게 <팬텀 스레드>가 위대한 멜로 영화인 이유다.

적어도 사랑만큼은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