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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만세 Oct 02. 2019

선물의 객체

꽃을 좋아한다. 나름대로 어필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로부터 꽃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생각해보니 지난 내 생일에는 그가 초밥 예약에도 실패한 데다 꽃까지 없어서 차가 떠나가라 울었다. 눈과 코에서 범람이 일어나 발음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와중에도, 나는 매우 구체적으로 '꽃도 없고'라고 대략 두 번쯤 말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거의 1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지금, 아직도 꽃은 없다. 


올여름, 무려 한 달 동안 아빠가 그의 누나들과 스페인으로 여행을 갔다. 엄마는 네 마리의 딸들(몹시 큰 개 3, 성격이 모난 고양이 1)과 함께 집을 지키며 주말에 우리를 초대했는데, 그는 예상보다 더 흔쾌하게 초대에 응했고 날씨 좋던 6월의 어느 주말, 우리는 내 부모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보통 운전은 내 몫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집 주소만 넘겨준 후, 조수석에서 눈으로 구름의 모양을 훑거나 날씨에 대한 찬사를 백 마디쯤 하거나 대개는 쓸모없는 이야기들을 했고 그는 때때로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며 목적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지형지물이라든지 길이라든지 하는 것들에 재능이 없다고 해도 그곳이 집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그는 차에서 내려 분홍빛 외벽으로 둘러싸인 꽃집으로 향했고,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는 엄마에게 가면서 전날부터 뭘 사 가지고 가야 할지 고민하고 찾아봤는데 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근처에 예쁜 꽃집을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알싸하고 싱그러운 향을 내뿜는 꽃다발을 안고 꽃집을 나서는데 눈이 시렸다. 내가 엄마를 보러 갈 때, 대부분 빈손으로 가는 실로 다정하지 못한 딸이라는 사실이 문득 선명해져서인지, 그가 내 엄마를 위해 아름다운 것을 샀다는 사실이 낯설어서인지 모를 일이었다. 


엄마는 그냥 와도 되는데 왜 비싼 꽃집에서 꽃을 사 왔냐는, 전형적인 할머니 같은 대사를 하면서 꽃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나는 엄마 옆에 바짝 붙어 조용히 하고 그냥 예쁘니까 고맙다고 해,라고 말하면서 꽃을 보는 엄마를 오래 바라보았다. 내 연인은, 한 번도 꽃 선물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온몸에서 어색함을 줄줄 흘렸지만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의 고마움을 되도록이면 오래 기억하기로 했다. 그는 나에게 꽃을 준 적이 없었으나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꽃을 들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주었다. 세상 그 어떤 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엄마는 우리가 떠나고 난 며칠 후에 꽃병에 담은 꽃 사진을 보냈다. 

'꽃 받아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네. 너무 예쁘다. 너무 고맙다고 또 말해줘.'

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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