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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신만나드립니다 Oct 27. 2022

최초의 서양인 한의사, 라이문드 로이어 한의사 (1탄)

최초의 서양인 한의사가 되기까지, 외국인 눈으로 본 한의학

‘회사 밖으로 나온 한의사들’의 다음 인터뷰이는 누굴까요? 바로 국내 유일의 서양인 한의사, 라이문드 로이어 원장님입니다. 자생한방병원 국제진료센터를 이끌고 한의학의 세계화를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노력하고 계신 원장님의 이야기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라이문드 로이어 원장님 약력]   

오스트리아 그라츠대 경제학과 중퇴

경산대학교(현 대구한의대학교) 한의학과 졸업

분당 차 한방병원 일반수련의 수료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한의학 박사학위 수료

(전) 대한약침학회 국제의사

(전) 국제동양의학회(ICOM) 이사

(현) 자생한방병원 강남 본원 국제진료센터 대표원장

(현) 대한한의사협회 국제위원

(현) 서울시 한의사회 부회장 




Part 1. 서양인 한의사가 되기까지


Q. 안녕하세요 원장님. 먼저 원장님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간단하게 소개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원래는 길게 소개를 해서 (웃음).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소개하자면 최초의 면허증이 있는 서양인 한의사 라이문드 로이어입니다. 아직까지는 최초이자 유일한 서양인 한의사이기도 하구요. 


Q. 그렇다면 길게도 한번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A. 그럼요. 저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987년에 한국에 처음 도착했어요. 처음부터 한국에 와야겠다 생각을 한건 아니고, 어렸을 때부터 ‘동양 Far East Asia’에 대해 관심이 있었어요. 처음엔 동양 무술을 좋아해서 시작된 거였는데, 그 배경에 있는 종교·철학·문화까지 포함해서 관심이 가더라구요. 그러나 그 당시에 중국은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굉장히 폐쇄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여행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다보니 그 주변에 어디 갈 수 있는 나라가 없나 찾다보니,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됐고, 찾아보니 태권도라는 무술도 있고, 불교 문화도 있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처음엔 여행을 목적으로 오게 됐어요.


Q. 한의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오셨네요?


A. 네, 그렇죠. 한국에 와서 여러 가지를 체험하면서 배워보고 싶었던 무술, 태권도를 배웠었어요. 태권도를 배우다가 발목을 삐었는데, 관장님께서 다친걸 치료하려면 ‘한의원’에 가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침이 뭔지도 몰랐는데, 침을 맞아야 낫는다고 해서 한의원에 가게 됐어요. 직접 침을 맞으면서 한의학을 체험하고, 그 과정에서 이러한 의술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거죠. ‘이게 뭐지?’ 라는 생각으로 호기심이 생겨서 본격적으로 한의학을 배워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좀 알아보니까 한국에서는 양의학은 의과대학에서, 한의학은 한의과대학에서 따로 배워야 한다더라구요. 그래서 한의대에 입학해서 공부를 해봐야겠다 싶어서 경희대를 먼저 찾아갔어요. 왜냐하면 경희대가 서울에 있어서 가까웠으니까 (웃음). 갔더니 경희대에서 담당하시던 분이 ‘외국사람은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이유를 물어보니, 제 앞에 영국 사람이 배우려고 입학을 했었는데 예과 생활 중에 유급을 계속 당해서 포기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 선례가 있어서 외국인은 수업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아예 받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었어요.


Q. 저도 예전에 몇 번 이상 유급을 당하면 아예 퇴학되는 제도가 있었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이유로 포기하신 분이 계셨던거군요. 그래서 원장님께선 어떻게 하셨나요?


A. 그래서 또 아는 사람 통해서 다른 한의대를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당시에 경산대, 지금의 대구한의대를 소개받아서 경산까지 갔죠. 경산대에서는 다행히 호의적이었어요. ‘외국인이 한의학 공부하면 좋을 것 같은데?’ 이런거죠. 근데 배우기 위해서는 한국말도 알아야 하고, 한자도 알아야 하니까 제가 준비를 좀 더 해와야 한다고 했어요. 알겠다고 대답한 뒤에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죠. 

   오스트리아에 일단 돌아가서 ‘한의학’을 배우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1989년에 연세대학교 어학당을 다니면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그 이후에 또 좋은 기회로 강릉대학교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면서 한자 공부도 같이 했어요.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1991년에 외국인 전형을 통해서 경산대학교 한의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Q. 입학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으셨네요. 그럼 그 과정에서 포기하고 싶으셨던 적은 없으셨나요? 


A. 중간에 힘들긴 했었지만,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워낙 한 번 목표가 생기면은 고집이 있는 편이라, 목표까지는 무조건 가는 그런 사람이라서요. 그리고 오히려 저는 입학하고 나서도 많이 힘들었거든요.


Q. 입학하고 나서 어떤 것이 힘드셨나요?


A. 제가 대구로 갔잖아요? (웃음)


Q. 아, 사투리. 아무리 한국어를 공부하셨다고 해도, 또 사투리는 다른 차원의 장벽이죠.


A. 네. 똑같은 한국말이 아니더라구요 (웃음). 지금도 OB(주 : Old boys의 약자, 나이가 있는 신입생들의 모임)가 있죠? 특히 서울에서 온 제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 몇 명 있었어요. 그래서 수업도 같이 듣고, 수업 끝나고 같이 놀기도 하면서 지냈는데. 그 친구들이랑 같이 앉아서 수업을 듣고 있으면, 제가 이해를 못해서 ‘교수님이 방금 뭐라고 하신거야?’하고 물어보면 그 친구들도 사투리를 못 알아 들어서 ‘나도 몰라’라고 대답하더라구요 (웃음). 초반에는 그렇게 언어 때문에 한번 힘들었었죠. 

  그 이후에도 예과 때 과목으로 한국사가 있었어요. 저는 외국인이니까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과목인데, 동기들은 born to be, 그냥 아는 내용들이잖아요. 다들 재미로 시험을 치는 그런 과목이었는데, 저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고 그냥 막막했어요. 또 생각보다 영어가 어려웠는데, 시험이 ‘(영어로 텍스트를 주고) 한국말로 번역하시오’ 이런 거였거든요. 저는 그러면 제 1외국어를 읽고 제 2외국어로 번역을 하는거죠. 그러다보니까 쉽지 않더라구요, 결국 C 맞았나? 이런 예과 과목들이 많이 힘들었는데 오히려 본과 올라가서 전공과목 배우다보니까 괜찮아지더라구요.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점수도 잘 나오고. 그래서 예과 때가 저는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Q. 그러네요. 다 같이 처음 배우는 내용들이니까, 오히려 전공과목들이 편하셨을 것 같아요. 그러면 당시 학교 생활은 어떠셨나요?


A. 학교 다니면서 동기들이랑 동아리를 하나 만들었어요. 아마 지금은 없어졌을텐데. 당시에 기공(氣功)을 하시던 교수님이 계셨어요. 저를 포함해서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몇 명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처음엔 거절하셨어요. 사실은 매 해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때까지 제자는 딱 한 명 두고 더 이상 받지 않으셨어요. 근데 제가 자꾸 가서 알려달라고 귀찮게 하니까, 또 제가 외국인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알았다면서 동아리를 허락해주셨죠. 

   모여서 공부도 하고, 따로 강의도 해주셔서 수업도 듣고, 속리산에 교수님 댁이 있어서 주말에 한 번씩 속리산에서 약초도 캐고…. 나중에는 동아리가 꽤 커져서 30~40명 정도까지 됐어요. 기를 느껴보고 싶었고, 그 때부터 기공 수련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Q.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의학을 전공하시기 이전에 경제학을 전공하고 무역회사에서도 일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경제학을 선택하게 된 계기와 이후에 안정적인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A. 처음에 경제학을 선택한 이유는, 돈에 대해 공부하면 돈을 벌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잘 알지 못하고 선택한거죠 (웃음). 돈 버는 것을 공부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입학했는데, 막상 공부를 해보니 그게 아니더라구요. 재미라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재미도 없더라구요. 돈을 벌어서 동양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입학 전부터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경제학은 내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고 무역 회사에 취직을 했죠. 일단은 돈을 벌어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동양에 가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무역회사는 동양으로 가는 여행비를 벌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제게는 안정적인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의미가 없었던거죠.



Part 2. 한의사 라이문드 로이어


Q. 원장님께서 한의사가 되시기까지의 긴 이야기를 들어봤는데요. 이제는 한의사로서의 삶에 대해 여쭤보고자 합니다. 졸업 후에 인턴 생활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A. 학교를 8년 만에 졸업했어요. 한 번은 한약 조제권 분쟁 때문에 학교가 뒤숭숭해서 휴학을 해서 쉬었고, 한 번은 분쟁 때문에 한의대 전체가 수업거부를 하다가 유급되어서 쉬었죠. 1991년 입학을 해서 1999년에 한의사 시험을 치고 졸업을 했는데, 막상 나와보니 아는게 없더라구요. 

   지금도 많은 한의사 후배님들이 그런 감정을 많이 느낀다고 들었어요. 저도 똑같았죠. 병원 실습도 하고, 참관도 몇 번 했는데 제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바로 한의사로 활동하기엔 자신이 없어서, 조금 더 체계적으로 테크닉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인턴을 지원했고, 전공으로는 침구학을 하려고 했어요. 수련기간 중에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만뒀지만요.


Q. 그러셨군요. 이후에 지금의 자리까지 오시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국제진료센터를 맡게 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A. 일반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나서 서울에서 부원장으로 근무를 했었어요. 5년 정도 부원장 생활을 하고 있던 중에 자생한방병원에서 러브콜을 받았어요. 국제진료센터를 운영해보려고 하는데, 그 센터를 맡아줄 수 있겠냐구요. 예전부터 한의학의 세계화에 대해 생각해왔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수락했죠.


Q. 요즘 원장님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시는지 알려주세요.


A. 제 루틴은 단순해요. 새벽 4시 30분쯤 일어나서, 남산이 근처니까 가서 운동을 좀 해요.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걷기 운동도 하고, 기공 수련도 좀 하고, 태극권도 좀 하고.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준비하고, 아침 먹고 출근하죠. 보통 병원에 8시 쯤 도착해서, 또 1시간 동안 환자 차트를 확인해요. 오늘은 어떤 환자가 있는지, 특이한 케이스는 없는지, 지난 밤 동안 문제는 없었는지 쭉 한 번 보죠. 9시부터 진료를 보기 시작해서 6시 정도에 끝납니다. 저녁에는 서울시 한의사회 부회장도 하고, 여러 자리를 맡고 있다 보니 행사를 가거나 회의를 하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요. 그리고 밤 10시나 11시 사이에 잠에 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규칙적으로 보내는 편이에요. 


Q. 국제진료센터에서 근무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환자분이 계시나요?


A. 너무 많죠. 간단하게 감기에 걸려서, 열이 나서, 여기 한국까지 오시는 환자분은 없잖아요. 대부분 본인의 나라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계신 환자분들이니까.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서 내원하시는 분들이니 복합적이고 복잡한 환자분들이세요. 소위 종합병원이라고 하죠. 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여기저기 다 아프신 분들. 신경 쓸 것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한 분, 한 분 다 기억에 남죠. 환자분들이 치료 받고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잘 왔다’라는 말씀을 해주시면 한의학에 대한 자부심도 생기면서 힘들었던 만큼 보람도 큰 것 같아요.




'한의학의 세계화'를 비롯한 한의학 이야기가 2편에서 계속됩니다. 


Interviewer. 토끼, 펭귄, 용, 그리고 알파카

Writer & Editor.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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