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절기 대한에서, 끝의 시작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작은 텃밭 정원을 몇 년째 가꾸고 있지만 도통 자라지 않는 기술과 지식과 마음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게으른 정원가의 24절기 활용법
대한(大寒): 양력 1월 20일경, 24절기 중 마지막 스물네 번째 절기. ‘큰 추위'라는 뜻의 절기이나 '소한의 얼음 대한에 녹는다.’라는 속담처럼 사실상 대한이 소한보다 덜 춥다. [출처:다음백과]
소한과 대한의 추위를 작다 크다 비교하고, 겪어보니 더 크다 덜 크다 세심하게 느끼게 되는 때, 추위에 민감한 겨울입니다. 이번 겨울은 유독 큰 추위가 왔다가 갑자기 포근해졌다가 눈이 펑펑 내리다 변화가 무쌍한데, 시골 살이를 한 뒤로 '날씨 감각'이 예민해졌다 싶기도 합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날씨 앱을 켜봐요.
오전에 볕이 드나, 오후에 눈이 얼마나 오려나, 밤에 별이 보이려나, 날씨에 맞춰 오늘 할 것과 내일 계획을 조율합니다. 최저 최고 기온의 차이, 강수량, 미세먼지도 물론 중요하고, 또 시골에서는 바람의 세기가 중요합니다. 큰 비, 큰 눈보다 더 무서운 건 큰 바람이에요. 바람이 세차게 불면 정원의 나무도 뽑힐 것처럼 흔들리고, 집 벽을 타고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정말 무서워요.
누구에게도 딱히 맞추며 산 것 같진 않은데 겨울의 날씨에는 정성껏 맞추며 살게 됩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또 편하다는 걸 몸과 마음이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얻게 된 보너스일까요? 날씨 예보를 보지 않아도 한두 시간 후 날씨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시골의 공기에는 색깔이 있습니다.
하늘의 빛이거나 땅의 빛이거나 혹은 나무와 풀의 빛일 수도 있겠어요. 하지만 공기에 색깔이 덧대어진 것 같은 기운과 농도과 질감이 분명 있습니다. 공기의 빛이 갓 구운 빵처럼 노르스름하면 따뜻한 볕이 따라오고, 달 뜬 밤처럼 푸르스름하면 쾌청한 기운이 하루 종일 득세하고, 무서운 검은빛이 감돌면 곧 비나 눈이 옵니다.
여러 빛깔의 공기 속에 몸을 푹 담그고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여기, 우리 집이 참 좋습니다.
눈이 두텁게 쌓인 정원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일, 그리고 눈이 덜 쌓인 쪽을 따라 마당을 살살 걷는 일 외에는 시골집 밖은 고요합니다. 고요한 시골집에서 커피 마시고, 책 읽고, 불 쬐고.. 분주했던 봄 여름 가을이 언제였던가,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 빈 공간과 시간을 유영하며 새로운 우주를 맞이합니다.
흰 눈은 공간을 꿈결로 만들고,
소음마저도 제거해 버려요.
겨울잠은 정원가에게도 필요합니다.
24 절기를 따라 게으른 정원가의 일 년간의 게으른 기록이 마지막 절기에 이르렀습니다.
끝과 시작, 그 개념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작위적인 시간 개념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늘 다른 의미를 줍니다.
22년 입춘부터 일 년간 기록한 이야기를 이제 매듭지으러 하니, 기록하는 손 끝이 움직여지지 않고, 어느새 입춘을 지나있습니다.
일 년 동안 돌아보면 시골집 정원은 그냥 그런대로 자연의 힘으로 무탈하게 지나오고, 정원가는 여전히 게으른 채로 시간을 건너왔습니다. 또 한 해의 입춘을 시작으로 어떻게 한 해를 보내야 할지, 그 시작은 여전히 느림보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부지런히 봄을 준비하고 있는 듯해요. 우수를 이틀 앞둔 오늘, 쌓인 눈은 어느새 다 녹고, 나무들의 가지 사이로 기지개를 켜고 있는 무성한 잎들이 그림처럼 오버랩되어 보여요. 끝과 시작, 그 지점엔 내 마음이 드나들며 나의 새로운 우주를 만나게 됩니다.
끝의 지점엔
서서히 스며드는 망각이 기다리고,
망각이 지나간 시작의 지점엔
새로운 설렘이 자리 잡습니다.
1. 고요한 시골집에서 겨울잠 쿨쿨
2. 지나온 24 절기를 회고하며,
3. 끝의 시작 맞이하기
끝
그리고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