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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배 Aug 17. 2021

헤이, 스콧, 웬즈데이, 사케, 오케?

멜버른에서의 사케 시음회

멜버른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 S는, 참으로 직업이 많은 친구였다. 2년 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갈 목표로 돈을 모으고 있다는 그녀는 평일이고, 주말이고, 저녁이고, 언제나 늘 바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직업 중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직업이 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케 테이스터, 사케 소믈리에의 일이었다. 시음 요청을 받은 일본 식당에서, 한 끼의 저녁 식사와 함께 사케를 마시고, 그 사케에 대한 품평의 글을 적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 많게는 한 달에 두 번, 멜버른 도심 내의 고급 일식 레스토랑들로부터 사케 시음 요청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꼭 나에게 전화를 걸어주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는 그리 길지도 않았다. “헤이, 스콧, 웬즈데이, 사케, 오케?”

“슈얼, 와이 낫?!!!  오케오케!!”


사케를 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난 나는, 요즘 이 노래를 듣는다며 AKB48의 노래를 그녀 앞에서 부른다. 나를 오타쿠라고 놀리는 다른 일본인 친구들과는 달리, 그녀는 두 손을 휘저으며, “Never, Ever!”라고 정색을 한다. 그 허접한 노래들을 듣느니 차라리 이 노래들을 들으라며, 일본의 락밴드 가수들을 세, 네 팀 알려주었지만, Rock이라는 장르는 원체 나와는 거리가 멀기만 한 장르다. (그나마 본 조비와 퀸의 노래들이라도 알고 있는 게 어디야ㅎㅎ)


매번 이렇게 시음회에 나를 불러주는 그녀가 고마운 이유는, 내가 공짜 사케를 마실 수 있어서도,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히 그녀의 고마운 마음 때문이었다.

전 세계의 맥주 병뚜껑을 넘어서, 이제는 전 세계의 와인과 럼 병뚜껑까지도 수집하고 있던 나의 수집 리스트에, 그녀는 일본의 사케 병뚜껑을 더해주고 싶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매번 사케 시음회에서 얻게 되는, 사케 병뚜껑을 나에게 선물처럼 건네주었다. 그녀는 이제는 병뚜껑만 보면 내 생각이 제일 먼저 난다고 했다.


며칠 전 동네 편의점 냉장고로부터, <Korean rice wine>이라는 한 라벨을 발견하였다. Wine이라는 영어단어를 보는 순간, 문득 호주에서 친하게 지냈던, 그 S라는 일본인 친구가 떠 올랐다. 사케를 재패니즈 체리 블로솜 와인(일본식 벚꽃 와인, 일본식 매실 와인)이라고 부르곤 했던 그녀! 하지만 나의 그 낭만적인 추억 여행은 1초도 안 되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Korean rice wine>이라는 영어 라벨의 바로 위에는 더 큰 크기의 폰트로 <국내산 쌀 막걸리>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막걸리를 굳이 영어로 풀어 설명하자면, 한국 쌀로 만든 와인이라는 표현도 맞긴 한데, 나에게 와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낭만적인 분위기는, 도통 막걸리라는 단어가 주는 분위기와 매칭이 되지 않는다. 하하하하하.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그럼 나도 오스트리아 빈의 필하모닉 부럽지 않은, 제법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Korean Traditional Orchestra band에서, 매일같이 Drum을 연주하고, 연주가 끝난 후에는, White Rice wine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의 친분을 더욱 돈독히 하곤 했던 그때 그 시절!” (이라고 쓰고, “풍물패에서, 매일같이 사물놀이 치고, 막걸리 마시며 놀았던 시절!”이라고 읽는다.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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