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염소>
피카소의 <염소>는 합판에 목탄을 곁들인 유화 그림이다. 합판 특유의 나뭇결이 염소의 털 무늬를 너무나도 잘 살려냈다. 합판의 나무 질감과 염소의 피부결이 이토록 조화로울 줄이야.
이 그림을 지면에 인쇄된 사본 작품으로만 보아오다가, 이처럼 합판에 그려진 원작으로 마주하게 되니, 이 그림이 유난히 더 새롭고 특별하게만 보인다. 고흐 그림의 그 거친 질감과 붓터치를 컴퓨터 스크린이나 교과서 지면이 아닌, 원작의 입체감 그대로 보게 되었을 때의 그 감동과 울림 같은 것이었다고 해야 할까?
카메라 성능이 나날이 발전하고, 사진 촬영 기술이 매일같이 향상된다고 하지만, 카메라와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원작 특유의 그 아우라와 카리스마가 있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과 책 속에서 쉽게 그림을 찾아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작 명화들을 보러 애써 미술관을 찾고, 전시회를 찾는 것 같다.
피카소의 염소 그림을 보았을 때, 나는 아일랜드 <골웨이>에 사는 염소 한 마리가 생각났다. 그 염소는 캐시아의 친한 친구이면서, 또한 내가 전에 그림으로도 한번 그렸던 적이 있는 염소다. 내가 그 염소 그림을, 캐시아에게 보여 주었을 때, 그녀는 나에게 “소녀 한 명만 그려 달라(Please, draw me a girl)”고 나에게 부탁하였다. “응, 한번 시도해볼게(I see. I will try it.)”라고 말은 하였지만, 나는 아직도 그 소녀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캐시아, 그녀를 예쁘게 그려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선 한 획마저도 쉽게 도화지에 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옛 말이 있지만, 무엇인가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모든 것에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그 한 걸음을 떼는 일조차 어렵게 만든다. 왠지 천리 길에서의 그 첫걸음부터 실수가 없어야 할 것 같고, 다른 사람에게 흠을 잡혀서도 안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카소의 염소 그림은 이러한 부담감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다소 이완시켜 준다. 우리는 합판의 모든 공간을 목탄과 물감으로 애써 채울 필요가 없다. 그 공간을 물감으로 가득 칠해야 한다는 생각에 애써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도 없다. 우리의 도화지를 물감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고 지시했던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다만, 기존의 많은 그림들에 길들여진 우리들만이, 도화지의 빈 공간이 주는 그 여백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검정색이든, 파란색이든, 노란색이든, 그 무슨 색으로라도 공간의 결핍을 애써 채우려 했을 뿐이다.
피카소는 염소의 몸통을 물감으로 칠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염소의 몸통이 합판의 날 것 그대로의 나뭇결과 함께 생기를 얻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들 삶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우리 삶의 어느 빈 구석을 메꾸기 위하여, 애써 물감으로 우리를 덧칠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피카소의 합판처럼이나, 우리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더 큰 감동과 메시지를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인 아오이는 샤워실 욕조에 몸을 뉘이고, 이내 깊은 생각에 잠긴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사실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중일 거야.’
피카소의 그림 속 염소는, 아무 색도 입혀지지 않았지만, 그 어느 그림들보다도 더 깊은 색을 발산하고 있다. 나는 생산적인,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그 부담감과 스트레스와는 전혀 무관하게 말이다. 생산과 창조, 업적과 성과의 압박에 길들여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옛 속담처럼이나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일테니 말이다. 피카소의 염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