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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배 Sep 22. 2021

도화지 속, 빈 공간을 애써 물감으로 채울 필요는 없다

피카소의 <염소>

피카소의 <염소> 합판에 목탄을 곁들인 유화 그림이다. 합판 특유의 나뭇결이 염소의  무늬를 너무나도  살려냈다. 합판의 나무 질감과 염소의 피부결이 이토록 조화로울 줄이야.


이 그림을 지면에 인쇄된 사본 작품으로만 보아오다가, 이처럼 합판에 그려진 원작으로 마주하게 되니, 이 그림이 유난히 더 새롭고 특별하게만 보인다. 고흐 그림의 그 거친 질감과 붓터치를 컴퓨터 스크린이나 교과서 지면이 아닌, 원작의 입체감 그대로 보게 되었을 때의 그 감동과 울림 같은 것이었다고 해야 할까?


카메라 성능이 나날이 발전하고, 사진 촬영 기술이 매일같이 향상된다고 하지만, 카메라와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원작 특유의 그 아우라와 카리스마가 있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과 책 속에서 쉽게 그림을 찾아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작 명화들을 보러 애써 미술관을 찾고, 전시회를 찾는 것 같다.


피카소의 염소 그림을 보았을 , 나는 아일랜드 <골웨이> 사는 염소  마리가 생각났다.  염소는 캐시아의 친한 친구이면서, 또한 내가 전에 그림으로도 한번 그렸던 적이 있는 염소다. 내가  염소 그림을, 캐시아에게 보여 주었을 , 그녀는 나에게 “소녀  명만 그려 달라(Please, draw me a girl)” 나에게 부탁하였다. “, 한번 시도해볼게(I see. I will try it.)”라고 말은 하였지만, 나는 아직도  소녀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캐시아, 그녀를 예쁘게 그려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획마저도 쉽게 도화지에 그을  없었던 것이다.


천리 길도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지만, 무엇인가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모든 것에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걸음을 떼는 일조차 어렵게 만든다. 왠지 천리 길에서의  첫걸음부터 실수가 없어야   같고, 다른 사람에게 흠을 혀서도 안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카소의 염소 그림은 이러한 부담감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다소 이완시켜 준다. 우리는 합판의 모든 공간을 목탄과 물감으로 애써 채울 필요가 없다.  공간을 물감으로 가득 칠해야 한다는 생각에 애써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도 없다. 우리의 도화지를 물감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고 지시했던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다만, 기존의 많은 그림들에 길들여진 우리들만이, 도화지의  공간이 주는  여백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검정색이든, 파란색이든, 노란색이든,  무슨 색으로라도 공간의 결핍을 애써 채우려 했을 뿐이다.


피카소는 염소의 몸통을 물감으로 칠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염소의 몸통이 합판의   그대로나뭇결과 함께 생기를 얻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들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우리 삶의 어느  구석을 메꾸기 위하여, 애써 물감으로 우리를 덧칠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피카소의 합판처럼이나, 우리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과 메시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장면이 생각난다. 소설  여자 주인공인 아오이는 샤워실 욕조에 몸을 뉘이고, 이내 깊은 생각에 잠긴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지금  순간도, 나는 사실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중일 거야.’


피카소의 그림  염소는, 아무 색도 입혀지지 않았지만,  어느 그림들보다도  깊은 색을 발산하고 있다. 나는 생산적인,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과 스트레스와는 전혀 무관하게 말이다. 생산과 창조, 업적과 성과의 압박에 길들여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속담처럼이나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일테니 말이다. 피카소의 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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