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멜버른의 상모버스커 2025
습관이란 게 무섭다. 휴가의 첫날이니까, 나지막이 일어나 게으른 아침을 맞이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6시가 되어 눈이 떠졌다. 어제와 그제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일기로 적고는 회사 일을 조금 하였다. 한국과 호주의 시차가 1시간 밖에 차이 나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메리트인 것 같다. 호주 시간으로 오전 10시가 되었으니, 한국은 이제 오전 9시가 되었나 보다. 한 주의 업무를 시작한 거래처 담당자분들이 한 분, 두 분, 메시지를 보내오신다. 지난 주말, 편안하게 잘 쉬다 오셨냐는 안부 인사가 오가지만, 이분들은 내가 호주에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으리라 전혀 생각지도 못하시겠지.
어제저녁에 인터넷으로 알아본 스테이크집이 12시부터는 매우 붐빈다고 하여, 가방에 일기장과 스케치북, 책 한 권을 챙겨 부랴부랴 식당으로 향한다. 오늘 점심으로는 닭가슴살 샐러드 한 접시, 그리고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캥거루 스테이크를 주문하였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가방에서 유현준 작가님의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책을 꺼내어 읽는다.
어디에서 살 것인가? 나에게는 이미 13년 전부터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다. 나는 이곳 호주 멜버른에서 살 것이다. 물론 비록 현재 13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나는 결국 이곳 호주 멜버른에서 살 것이다. 언어? 소득? 문화적 환경? 정서적 만족도? 경제적 안정성? 나는 이곳 멜버른의 모든 것들에 만족한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 사회 생활하며 쟁취한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이곳 멜버른에서 다시 살리라. 멜버른에서 호텔방을 청소하고, 길거리에서 상모를 돌리며 살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이곳 멜버른에서 살리라. 나에게 멜버른은 그만큼 소중하고 애틋한 도시다. 나의 20대와, 나의 청춘과, 나의 열정과, 나의 패기와, 나의 꿈과, 나의 좌절과, 나의 마지막 불꽃을 함께한, 나에게는 일기장과도 같은 도시. 이 도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나의 지난 20대를 다시 바라보는 것 같은 정겨움이 있다.
내친김에, 카카오톡의 프로필 사진을 바꾸었다. 프로필 상태명도 바꾸어버렸다. <어디에서 살 것인가?>
나의 프로필을 확인한, 회사 동료들이 하나둘씩 메시지를 보내온다. 나의 얼굴을 거진 3~4년 봐 왔지만, 이렇게 밝은 표정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다고. 호주가 아무리 좋아도, 다음 주 월요일에는 어김없이 꼭 사무실로 출근해야 한다고. “네, 그럼요. 당연히 출근하고 말고요”라고 애써 대답하였지만, 내 안에는 다분히 반항아적인 기질이 있어서,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할수록, 나는 더 고집을 부리게 된다.
회사 분 중 한 분이 나에게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과장님께서 호주를 이토록 좋아하시는지 몰랐어요. 어쩌면 과장님은 한국에서의 삶보다 호주에서의 삶이 더 행복한 분이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멀리서 보기만 해도 과장님은 호주에서의 삶이 한국에서의 삶보다 더 맞으시는 것 같아요. 그렇게도 호주를 좋아하시는 분이 한국에서는 그동안 어떻게 사셨는지 궁금해지기도 해요.”
회사 사람들은 당연히 모를 테다. 나에게 <멜버른>이라는 도시가 갖는 그 의미를 말이다. 지금이야 회사, 집, 회사, 집 밖에 모르는 몸무게 100KG짜리 김 과장이 되어버렸지만, 13년 전의 멜버른에는, 지금의 나보다 더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스캇 플린더스라는 젊은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낮에는 호텔에서 손님방을 청소하고, 밤에는 거리로 나와 춤을 추었지만,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리고, 세계의 어느 친구들과 만나더라도 히히덕거리며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곤 했던 그런 예술인 감성 가득한 젊은이가 있었더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