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군가의, 사랑받는 갑 티슈가 되고 싶다

모딜리아니의 <잔 에뷔테른>

by 김정배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보았을법한 모딜리아니의 그림. 사람들은 아마 이 그림을 보며 '모딜리아니'라는 이름보다 '갑 티슈'라는 이름을 더 많이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눈동자 없이 길쭉하게 왜곡된 얼굴, 그 표정은 얼핏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을 닮았다. 그림 속 여인의 길쭉한 얼굴과 비교하여 의자에 앉은 여인의 몸은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되었는데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몸이 더 굵어지는 형태이다. 얼굴과 몸이 이루는 이러한 삼각형의 구도는 작품의 중앙에 위치하며 작품 전체에 안정감을 준다.

우리 집에도 이런 종류의 갑 티슈가 몇 개 있다. 우리 집에서 갑 티슈의 1차적인 수명은 보통 1개월. 고급 화장지로서의 본래 임무를 마치고 나면 갑 티슈는 이내 우리 할머니의 전용 쓰레기통이 된다. 그렇게 연명하는 2차적인 수명이 다시금 1개월. 그렇게 2개월이라는 길지도 않은, 짧지도 않은 삶을 살고 나면 이내 우리 집 바깥 아궁이에서 불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삶이란 것도 갑 티슈에 그려진 모딜리아니의 그림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름다운 그림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우리 생활 속의 일부가 되어버린 모딜리아니의 '잔 에뷔테른'. 자신이 원하였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작품 속 '잔 에뷔테른'이라는 여인은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의 팝아트보다도 더 상업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과유불급이라고 하였나. 과함이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그림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나머지, 그림은 할머니의 빈 박카스병을 담는 쓰레기통으로, 아궁이의 불쏘시개로 전락해버렸다. 차라리 고갱의 그림으로 태어났더라면 적어도 우리 동네 이발소의 싸구려 액자에라도 담겨 있었을 것을.....

그동안 나는 모딜리아니의 그림에서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눈동자가 없는, 눈동자가 있더라도 까맣게 생기가 없는 얼굴들을 바라보며 그림에서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모딜리아니를 바라보는 나의 눈동자가 더 생기 없지 않았었을까? 나도 먼 훗날에는 누군가의 사랑받는 갑 티슈로, 사랑받는 휴지통으로, 사랑받는 불쏘시개로 기억되고 싶다. 나도 먼 훗날에는 누군가의 가슴에 따스한 온정을 지피는 그런 명화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모딜리아니의 'Jeanne Hebuterne'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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