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서 살아야 하는 당신이 반드시 챙겨가야 하는 것

에곤 쉴레의 <자화상>

by 김정배

에곤 쉴레 - 자화상

당분간 무인도에서 생활해야만 하는 당신에게 네 가지 물건이 주어졌다. 책, 거울, 씨앗, Mp3. 이 네 가지 물건 중에서 오직 한 가지만을 챙겨야만 한다면 당신은 어느 물건을 선택할 것인가? 일 분의 시간을 드릴 테니 천천히 생각해 보시라.........
어느 가벼운 책에서 읽었던 심리테스트인데, 나는 벌써 몇 년째 이 심리테스트로 낯선 이와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과외에서, 알바에서....... 당신이 선택한 물건은 당신이 미래의 배우자를 고름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하는 덕목을 의미한다고 한다. 먼저, 책은 배우자의 '지식'을, 거울은 배우자의 '외모'를 의미하며 씨앗은 배우자의 '경제력'을, 마지막으로 MP3는 배우자의 '유머 및 분위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나는 4가지 중에서 거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나의 지인들 중 어느 누구도 거울을 고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오직 한 사람! 내 동생만이 나와 같이 거울을 가져가겠다고 하였다. 내 동생이 거울을 고른 이유를 듣고 나니 '누가 뭐래도 역시 형제는 형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네 가지 물건 중에서 Mp3를 제일 먼저 제하였다. 그 이유인즉슨, Mp3는 위의 네 가지 물건 중 그 수명이 가장 짧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으로 제외한 것이 책인데, 책이라는 것 역시 그 수명이 거의 반영구적이기는 하지만 습기와 물에 약할뿐더러 책 한 권으로 한정된 그 텍스트들에 금방 질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곡물의 씨앗도 중요한 물건이긴 하다. 어느 식물, 어느 열매가 생명에 유해한 지, 무해한 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가져간 씨앗은 의식주 중에서 '식'만큼은 확실히 해결해 줄테니까! 하지만 굳이 내가 챙겨간 씨앗이 아니더라도 어느 식물, 어느 열매를 먹어야 생명에 무해한 지는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 같다. 왜냐, 주변의 동물들이 먹는 것들을 눈여겨보았다가 나중에 따라 먹으면 되니까!

그러나 거울은 꼭 필요할 것 같다. 왜냐? 내 얼굴을 봐야 하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면 많은 이들이 웃음보를 터트린다. 형, 그렇게 안 봤는데 왕자병이었냐고...... (뭐, 사실 왕자병일 수도 있다. ) 그러나 거울을 보는 행위는 사실, 다른 어느 행동보다도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거울을 본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바라 본다는 것이고, 바로 나 자신과 마주한다는 것이니까! 그래서 내 동생은 거울을 챙겨갈 것이라고 한다. 거울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이나마, 자신의 행적을 돌이켜 볼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나도 그 말에 공감하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넋 놓고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다가도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볼 때면 문득, 문득의 생각들이 떠 오르니 말이다.

나는 무인도에서 그 무엇보다도 '나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가 말하기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생각할 수 있는 '나'가 있기에, 각 주체들은 자신의 존재 역시도 생각할 수 있으며, 그 생각만으로도 '나'가(=자신이) 존재함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하는 나'가 있기에 앞서, '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가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는 나'가 있을 수 있는가?

나의 것이지만 정작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부르고 더 많이 입에 올리는 것이 자신의 이름인 것처럼, 나의 눈, 나의 코, 나의 입, 나의 눈썹이지만 나에게 있어 나의 얼굴은 어느 누구의 얼굴보다도 낯선 것이다. 거울을 바라보지 않는 이상, (셀카를 찍지 않는 이상) 자신의 얼굴을 마주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무인도에 거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적어도 아직까지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문득 옛날 옛적 귀신 이야기가 생각난다. 귀신에게 홀려 자신도 귀신이 되어버린 사람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고 했던 그 귀신 이야기 말이다.)

나는 나의 얼굴이 좋다. 눈썹은 반이 없고, 속눈썹은 여자의 것 마냥 치켜 올라갔고, 한쪽은 쌍꺼풀, 한쪽은 쌍꺼풀 없는 짝짝이 눈이지만 그래도 나는 나의 얼굴이 좋다. 그래서 나는 내 얼굴을 그렇게도 그림으로 그리고 앉아있나 보다.

만일, 내가 무인도에 딱 한 가지 물건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면 나는 필기도구와 일기장을 가져가고 싶다. 필기도구와 일기장은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두 개의 물건이라고 딴지를 걸 수도 있지만, 우리 솔직히 이번만큼은 좀 너그럽게 봐주자. 나는 지금의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거울만큼이나 일기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시행하기 위해서,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일기장이라는 도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 없는' 무인도는 아니더라도, '아는 사람 없는' 무인도에 들어가게 된다면 나는 일기장에 한 가지 물건을 더 챙기고 싶다. 4B 연필이야 아까 무인도에서 필기도구로 챙긴다 했으니, 이번에는 스케치 북 하나만 더 챙겨가고 싶다. 내가 하고 있는 순간순간의 생각, 내가 가지고 있는 순간순간의 느낌을 글로,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 나는 나를 잊고 싶지 않다.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나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나 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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