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코끼리들이 말뚝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르네 마그리트의 <들판으로 가는 열쇠>

by 김정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을 때가 중학교 1학년 때였는지, 아니면 2학년 때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기억되는 구절이 있으니, 한 마리 아기 새가 알에서 깨어 나오기 위해서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반드시 깨트려야 한다는 글귀였다. 이 글귀는 트리나 폴머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간절히 원해야 해. 한 마리 애벌레로서의 삶을 포기할 정도로 간절하게......" 사실 이 두 소설의 글귀들은 니체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실제로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소설, <데미안>이 니체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쓰였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하여 '귀족적인 정신'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노예적인 정신'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신이라는 존재의 죽음을 우리가 인정할 때, 그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신이라는 존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리 스스로 주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아끼는 동아리 후배가 자신은 요새 <데미안>을 읽는다며 연락을 해 왔다. 데미안의 내용을 떠올리려니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이 참에 다시 읽어볼까 하다가, 문득 예전에 읽었을 때에도 어렵게 어렵게 한 글자 한 글자 읽었던 기억이 나서 바로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그 후배에게 알에서 새가 깨어 나오는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이야기하였더니 후배는 며칠 뒤, 그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었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며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전 왕조를 무너뜨려야 한다. 훌륭한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스승을 뛰어넘어야 한다. 올림픽에서 신기록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기록들을 깨트려야 한다. 파괴의 과정이 없고서는 창조의 과정 역시 존재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파괴라는 것이 말 그대로 닥치는대로 깨 부수는 파괴의 행동이 아니라, 기존의 편견과 선입견에 대한 파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한 배경도 당시 유럽 사회에서 '이성'과 동일시되어왔던 기독교 교리관의 구속으로부터 개별 주체들의 사고를 보다 자유롭게 하는 데에 있었다.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는 저 밖에 있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르네 마그리트의 '들판으로 가는 열쇠'는 이러한 앞선 논의들을 상징하는 그림이 아닐까 싶다. 그림 속의 깨진 유리창 파편에 바깥 풍경이 담겨 있다. 보통의 유리와 같은 투명한 색의 파편이 아니라, 마치 유리창의 파편에 바깥 풍경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인위적인 모습이다. 이 그림을 보노라면 지금껏 우리가 바깥 풍경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보아왔던 창 밖의 풍경들이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미리 그려진 허구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허구를 진실인양 바라보아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오늘날과 같은 매스미디어의 시대에 이처럼 허구를 진실로, 진실을 허구로 속이는 일은 더더욱 쉬워진 것 같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데미안>과 <들판으로 가는 열쇠>를 끌어들인 걸까? 인도의 코끼리 조련사들이 수백Kg가 넘는 코끼리들을 길들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사람 키보다 작은 어린 코끼리를 잡아들여 그 발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두꺼운 말뚝을 박아 도망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 어린 코끼리는 그 쇠사슬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지만 어린 코끼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무리수다. 제 풀에 지친 어린 코끼리는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 쇠사슬과 말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게 쇠사슬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어린 코끼리는 이제 수백 Kg가 넘는 어른 코끼리가 된다. 어른 코끼리의 발에는 여전히 쇠사슬이 채워져 있지만, 어른 코끼리의 힘으로는 언제든지 말뚝을 뽑아버릴 수 있을 만큼 그 말뚝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어른 코끼리는 여전히 그 말뚝과 쇠사슬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 아니, 탈출하려는 시도조차 않는다. 유년시절의 학습으로부터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저 말뚝과 쇠사슬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묶여 있는 발에 조금만 힘을 줘도 말뚝 따위야 금세 뽑아 버리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텐데, 타성에 젖어버린 어른 코끼리는 탈출에 대한 욕망마저 속박되어 버렸다.

나는 진심으로 인도의 많은 코끼리들에게 앞서의 <데미안> 구절을 읽어 주고 싶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며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이 세상의 많은 코끼리들이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말뚝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이 세상의 많은 어린 새들이 알에서 깨어 나와 하늘을 향해 힘찬 날개 짓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의 많은 애벌레들이, 자신이 만든 고치를 뚫고 나와 한 마리의 나비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모든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애벌레로 남고 싶은 애벌레는 애벌레로 남으면 된다. 그리고 애벌레 또한 반드시 나비일 필요도 없다. 나방이면 어떻고, 사슴벌레면 어떻고, 매미면 어떠랴. )

들판으로 가는 열쇠가 지금 여기에 있다, 바로 우리들 마음속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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