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욕구, 욕망에 대한 담론

뭉크의 <마돈나>

by 김정배

며칠 전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손님 옆에서 과일주를 만들고 있었고, 테이블에 앉은 남자 손님은 내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에 동석한 이들에게 한창 설교 중이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욕구가 있는데, 하나가 식욕이고, 다른 하나가 배설욕이고, 나머지 하나가 수면욕이라서 나는 너와 자고 싶다.'는 식의 이야기. 뭐, 이런 사람이 있는가 싶었다. 매슬로의 5단계 욕구설을 빙자한 저질의 작업 멘트!

나는 욕구라는 것이 결국에는 죽음에로의 욕망으로 귀결한다고 생각한다. 식욕, 성욕, 배설욕, 수면욕! 특히나 이와 같은 동물적인 생리욕들은 많이 탐하면 탐할수록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더 빠르게 다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과유불급이라고, 많이 먹는 것, 많이 배출하는 것, 많이 자는 것이 우리의 건강에 좋을 것은 없다고 본다. 더군다나 영원히 잠든다는 것이야말로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마돈나'는 본래 성모 마리아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마돈나'라는 가수가 그 이름을 사용하며, '마돈나'라는 단어에 내재한 신성함을 섹시 아이콘으로 대체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마돈나'라는 단어를 들으면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보다는 '죽여주게 섹시한 여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물론 오늘날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마돈나라는 여가수는 마이클 잭슨과 같은 58년 개띠로 우리나라 나이로는 60을 훌쩍 넘은 나이이기에, 오늘날에까지 섹시하다고 이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죽여주게 섹시한 마돈나! 나는 이 그림을 보았을 때 바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성스럽고 조신하게 그려져야 할 성모 마리아가 매혹적인 몸짓의 팜므파탈로 그려진 것에 대해 나는 이 마돈나가 혹여나 'Like a virgin'의 그 마돈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팜므파탈! 그녀는 죽여주게 매혹적이다. 그래서 그녀의 아름다움은 치명적이다. 그리고 모든 욕구는 죽음에로의 욕망으로 귀결한다!

아마 스물한 살 때였나 보다. 거의 2주일을 죽음을 소재로 한 책들만 읽은 것 같다. <타나토노트>, <아르헨티나 할머니>, <비프스튜 자살클럽>........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나'라는 인물은 죽음에 대하여 너무 많은 의미 부여를 하고, 그 후유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그 사람과 그만큼 돈독한 관계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죽음의 역사>라는 책에 따르면 중세의 유럽까지만 해도 모든 장례식은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래야 떠나는 이도 기분 좋게 이승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고 자라다 병들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죽음이 어느 순간부터인지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죽음은 기피의 대상이 되었고,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 죽음은 예전과 같이 축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병실, 혹은 요양원과 같이 일반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조용하고 엄숙하게 그리고 침울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죽음을 금기시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죽지 않는 사형수! 죽을 수 없는 식물인간!

요 몇 년 동안 느낀 건데 백 년 채 못 되는 인생, 그렇게 악착같이 아등바등 사는 것도 결국에는 자기 장례식에 조문 올 이를 한 명이라도 더 만드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백 명이든 이백 명이든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나의 죽음을 맞이하러 와 준다면 내 인생 그래도 의미 있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백 명, 이백 명이 아니어도 좋다. 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줄 이가 열 명만 되어도 이 내 인생 성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에두바르 뭉크의 마돈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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