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기의 <자라지 않는 나무>
아스팔트로 포장된 통행로에 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아스팔트가 없다한들 제 발로 어디를 갈 수 있겠냐마는, 그림 속 나무들은 아스팔트에 의해 꼼짝없이 발이 묶인 셈이다. 제일 왼쪽에 있는 나무는 세 그루의 나무 중에 가장 굵은 기둥을 가졌다. 그러나 그의 가지는 길게 뻗지를 못하고 잘리어 있다. 제일 오른쪽에 있는 나무는 심지어 그 기둥마저 잘려있다. 그나마 그림의 가운데에 있는 나무는 양 옆의 나무들에 비하면 가장 몸이 성한 편이다. 그러나 이 나무 역시 빈약한 두께의 기둥이며, 아래로 쳐진 가지며, 그림 속 다른 나무들만큼이나 생명력이 없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그림의 제목은 '자라지 않는 나무'다. 그림 속 나무는 자라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자라지 못하는 것일까.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손상기는 유년시절에 얻은 신체적 장애로 평생을 꼽추로 살며 그의 삶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적 궁핍과 신체적 장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던 화가는 다른 누구보다도 풍부하고 예민한 감수성으로 예술 활동을 하였을 것이다.
이전에 윤병구 씨가 쓴 <잡초는 없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아름다우며, 우리가 감히 잡초라고 부를 만큼 하찮은 생명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우리가 쓸모없다고 부르는 잡초도 사실은 우리 인간에게만 무익한 풀이지, 다른 생명체들에게는 매우 이로운 풀임을 증명한다. 나도 이 세상에 잡초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들 하나하나는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모두는 잡초처럼이나 언제 잘릴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프로이트가 말한 거세의 공포로부터 늘 자유롭지 못하는 셈이다. 장학금이 잘리는 것은 아닌지, 회사에서 잘리는 것은 아닌지, 친구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잘려 나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늘 고민하고 걱정한다. 우리들 역시 가지가 잘릴까 두려운 한 그루의 나무들인 셈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만, 잘리어진 가지에도 봄은 오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우리 삶의 기반이 흔들릴수록, 우리는 더욱 깊이 뿌리내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봄을 기다리면,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오리라. 그리고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을 하나의 눈짓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