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의 <멜랑콜리>
인간은 슬픔의 존재이다. 인간의 욕구들은 현실 내지는 문명에서 억압을 받고 있으며, 이는 곧 무의식이 되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문명의 틀 속에서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그 억압을 해소하며, 그 상처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한다.
인간은 감성적인 안정을 위하여, 자신의 상처 받은 감성을 치료하려는 본질적인 욕망이 있다. 그 상처를 해소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초월 혹은 승화를 통한 방법이다. 우리는 예술을 통하여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일들을 이루며, 승화라는 방법으로 상처를 보상받는다.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 신데렐라와 백설공주의 신분 상승 스토리에 감정이입을 하며 힐링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이라도 우리가 감동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해소 방법은 현실 자체를 실체로 인정하고 사랑해 버림으로써 그 현실 속에서 위안을 삼는 것이다. 즉, 현실적 슬픔 자체를 인간의 한계로 느끼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려는 욕구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인간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많은 비극 속에서 주인공의 죽음을 바라보며, 그것에 감동을 받는다. 우리의 무력함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 그러한 비 자족성을 차라리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감성 때문이다.
일전에 어느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호주에 가기 전의 나의 그림과 호주에서의 나의 그림 간에는 그 분위기가 다소 다르다고 말이다. 호주에 간 이후로 나는 그림을 그림에 있어 밝은 색을 더 자주 쓰는가 하면, 그 표현 역시 전보다 더 자신 있어 보인다고 하였다. 내가 그랬었던가 생각하다가, 가만 생각해보니 호주에서의 마음가짐과, 호주로부터 돌아오고 나서의 그림을 그리는 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져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호주에서는 내가 초월해야 할, 승화해야 할 상처가 있었다. 마음의 상처를 뛰어넘게 해 줄 어떤 즐거움이 나는 필요했고, 그리고 그곳에 그것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다시금 내가 떠안고 가야 할 상처가 있다. 그것을 뛰어넘으려 애쓰기보다는 그것을 끌어안고 가기로 마음먹은 상황에서, 호주에서의 나의 그림과 한국에서의 나의 그림 간에는 다소 차이점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현실을 초월하기 위하여 그릴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인정하기 위하여 그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