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다냥 부브레의 <사진관에서의 결혼 파티>
이미지(형상, 사진, 그림)가 귀한 때가 있었다. 핸드폰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전화와 문자만 되던 시절, 나는 폰카(카메라가 달린 핸드폰)를 가진 친구가 부러웠다. 그 친구는 자신이 찍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사진으로 찍었다. 내가 짝사랑으로 가슴앓이하던 때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가 좋아하던 소녀와 사진을 찍곤 하였다. 나는 매일 밤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애써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늘 흐릿하게 보이기만 하던 그녀의 모습을, 그 친구는 자신의 핸드폰에 찍어둔 사진으로 아무렇지 않게 대신하였다. 물론 나도 할 수만 있었다면 일회용 카메라를 학교에 가져가, 짝사랑하던 소녀와 사진을 찍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그 당시(2002년)의 사진이란 소풍이나 운동회와 같이 특별한 날에만 찍는 그런 용도의 것이었지, 평일날의 학교 교실에서 아무렇지 않게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필름 카메라였기 때문에 찍을 수 있는 기회가 한정적이었던 것도 있었겠지만, 오늘날의 디지털카메라처럼 바로바로 이미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작용했었을 테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미지의 홍수, 이미지의 범람 속에서 살고 있다. 개인이 원하는 이미지는 인터넷을 통해 언제든 검색할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의 사진은 그 사람의 페이스 북으로부터, 혹은 인스타그램으로부터 얼마든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이미지들이 넘쳐나니, 이미지들의 지위도 따라 낮아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급이 많아지면 희소성이 낮아져 균형 가격이 낮아지는 경제학의 원리처럼 말이다.
이미지(형상, 그림, 사진)가 귀하던 시절, 이미지는 그 존재 자체로 어떤 상징성을 지녔다. 그래서 어느 종교는 그 상징성을 우려하여 우상숭배를 금지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지가 넘쳐나는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쁜 날, 축하해야 할 날, 사랑하는 이들과 그날의 감정을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다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미지가 넘쳐나고, 이미지가 범람하지만 나는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그 고유의 신비성과 상징성은 아직까지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난 몇 세기 동안 수행해왔던 그 이미지의 역할들이 오늘날의 디지털기기들과 만나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롭게만 느껴질 따름이다.
(P.s 어떻게든 핑클의 사진이 실린 잡지 페이지를 얻어내려고 같은 반 여자아이들에게 아부를 떨던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더 이상 핑클의 화보를 모으지 않는다고 한다. 인터넷에 몇 글자만 입력하면 그가 원하는 이미지들이 수도 없이 검색되니 굳이 여학우들을 따라다니며 아부를 떨 필요가 없어졌다고 한다. 아니, 어쩌면 핑클이 더 이상 방송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소년은 이제 핑클 사진을 대신하여 잇지와 오마이걸의 사진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뭐, 사실이건 아니건 그렇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