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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배 Jul 09. 2021

멋진 신세계와 술 권하는 사회

에두바르 뭉크의 <그 다음날>

1. 올리비아 헉슬러의 소설, <멋진 신세계>는 철저한 계급 사회다. 모든 인류가 평등했던 이전 세대에서는 서로의 이권을 위해 다투기 일쑤였고, 그래서 싸움과 전쟁의 역사가 그치지를 않았다. 그래서 '멋진 신세계'의 엘리트들은 사회를 철저히 계급화하고 '소마'라는 일종의 환각제를 통해 사회를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멋진 신세계의 인류는 감정의 심한 동요가 일어날 때마다, 일정량의 소마를 복용하도록 교육받았고, 또 그렇게 길들여졌다. 소마를 먹고 잠이 들면, 그 다음날은 거짓말처럼 행복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래서 멋진 신세계에는 범죄도 없고, 불행한 사람도 없고, 불평불만을 하는 사람도 없다. 그들은 인간관계, 금전 문제, 노동 문제, 질병 문제, 사회의 부조리 등에 대해 고민하고, 분노할 이유가 없다. 소마가 구성원들의 근심과 걱정을 해소해주는 이상, '멋진 신세계'는 말 그대로 언제나 '멋진 신세계'이기 때문이다.

 

2. 한편, 현진건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에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고뇌하는, 조선말의 지식인이 등장한다. 일본 동경에까지 가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공이지만, 일제 치하의 사회에서 한 명의 지식인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술을 마시는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는 매일 같이 술에 젖어 산다. 주인공의 무기력함을 보다 못한 그의 아내가, "도대체 누가 그렇게 매일같이 당신에게 술을 권하더냐"고 묻는다. 그는 사회가 자신에게 술을 권한다고 답한다. " 도대체 그 사회라는 자가 누구길래 자꾸만 우리 남편에게 술을 권하더냐"는 아내의 깊은 한숨은, 블랙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이나 씁쓸하게 다가온다.

 

3.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이들은, 늘 그 사회에 불만이 있는 자들이었다. 현 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원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불만을 최대한 누그러트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불만을 해소시키지 않는 이상, 그들은 언젠가 현 체제를 전복, 혹은 변화시키고자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많은 정치인들이 3S 정책(Sports, Screen, Sex)을 통해,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술이라는 물질 역시 '멋진 신세계'의 소마처럼이나, 구성원들의 불평불만을 해소하고, 그들의 감정을 어느 정도 일정한 수준으로 제어하는 하나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술이라는 음료가 어찌 감히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간 동안, 인간과 함께 할 수 있었겠는가.

 

4. 권여선의 소설, <안녕, 주정뱅이>에는 자신의 아픈 과거, 혹은 괴로운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과음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에게 술은, 잠시나마 그들의 고통을 무디게 해주는 진통제인 셈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그들이 마주한 상황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수많은 애를 썼을 것이다. 그들의 의지가 약해서 알콜 중독이 되었다기 보다는, 이 사회가 얼마나 술을 권하였으면 그들의 강한 의지까지도 굴복시키고, 그들을 알콜 중독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술을 마시고 있는 나 자신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어느 소설가의 표현처럼이나, 술은 술을 부르고, 그 술은 또 술을 부른다. 악의 순환고리! 차라리 그들의 손에 쥐어진 게 소주병이 아닌, 한 봉지의 소마였다면......

사연 없는 귀신은 없다고, 알콜중독자들의 지난 과거들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가족까지 술로 인해, 함께 불행해져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말한다. 예술을 하려면, 술은 반드시 마셔야 한다고.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여, 예술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왜 예술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의 가족들의 피해가, 폭력이 정당화되어야 하는가. 예술가의 알콜 중독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사람은 그의 가족들일 텐데, 정작 그의 예술작품을 통해 삶의 행복함을 느끼고 마음의 평온을 느끼는 것은 왜, 그의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어야만 하는가.

 

5. 소마에 의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되는 사회(= 멋진 신세계)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아마 그곳에서는 개인의 자유 의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각 주체가 자신의 존재의 이유까지도 뿌리 깊게 의심하게 만드는 부조리한 사회(= 술 권하는 사회)에서도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멋진 신세계에서도 살고 싶지 않고, 술 권하는 사회에서도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대체 어디에서 살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술을 마셔야 할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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