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 걸은 하루, 하윤이의 작은 성장
오늘은 특별한 목적지 없이,
그저 벳푸역에서 바닷가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지나가는 트럭, 레미콘차, 크레인차를 보며 하윤이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오늘도 시윤이는 “아 아-”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참견하기 바쁘다.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바다 쪽으로 향했고,
생각보다 벳부역에서 가까웠다.
벳부가 참 좋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엔 바다 뒤로는 산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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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마주한 풍경
바닷가에 가까워질수록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고,
공원과 연결된 넓은 계단이 보였다.
우린 그 계단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쉬었다.
한편에 노란 모자를 쓴 아이들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어린이집에서 소풍을 나왔나 보다.
하윤이는 그 모습을 보고는 “나도 같이 놀고 싶어!” 하며 방긋 웃었다.
그 말이 괜히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곧이어 계단 아래쪽에서 다른 아이들이
신발을 벗고 모래사장을 뛰노는 모습이 보였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깔깔 웃는 아이들을 보며
하윤이도 “나도 들어갈래!”라고 말했다.
예전 같으면 모래가 발에 묻는 걸 유난히 싫어했을 텐데, 몇 번 해보니 이젠 괜찮단다.
조금씩, 자연스럽게 변해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참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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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이와 바닷물 속으로
시윤이는 아빠와 함께 계단에 남기고
나만 하윤이 손을 잡고 물가로 내려갔다.
발끝에 차오르는 파도에 하윤이는 환하게 웃었다.
조심조심 걸어가다 모래 위에 철푸덕 앉아버리기도 했지만 그 모습마저 자유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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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내가 고를래요
바다에서 실컷 놀고 나니 배가 고파졌다.
근처 패밀리레스토랑에 들어갔는데,
키즈메뉴판을 따로 주었다.
그 작은 메뉴판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던 하윤이는
“이거 먹을래!” 하며 스스로 골랐다.
혼자 메뉴를 고르고, 기다리고, 먹고—
그 모든 과정이 한 뼘 더 자란 듯 보였다.
주문 후엔 장난감 상자를 가져다주며
하나를 고를 수 있게 해 줬다.
하윤이는 신중하게 고민하다가
노란 자동차 하나를 골랐고,
식사 시간 내내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국보다 일본이
아이와 함께 다니기 편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웬만한 식당엔 아기의자와 아이 식기가 기본으로 구비되어 있고,
키즈 메뉴는 따로 준비되어 있는 곳이 많다.
엄마인 나에게는 그게 얼마나 큰 배려인지,
여행을 하며 새삼 느낀다.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가게 사장님이 풍선으로 멋진 칼과 곰돌이를 만들어주셨다.
아이들을 참 좋아하는 풍선 할아버지. 받자마자 실수로 터트렸는데 바로 다시 만들어주신다.
너무 즐거워하는 하윤이와 받자마자 풍선을 입으로 뜯는 시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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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오후엔 잠시 쉬고 싶어 커피를 마시러 갔다.
검색해서 찾은 유명한 카페는 만석이었고,
아이들과 함께 오래 기다릴 순 없어서
근처 골목을 걷다가 눈에 띈 조용한 카페로 들어갔다.
간판도 메뉴판도 전부 일본어,
겉으론 그냥 현지 카페처럼 보였지만
문 옆에 붙은 작은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어 예배 안내’라는 문구였다.
들어가 보니
직원들이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를 섞어가며 쓰고 있었다. 메뉴에 한국어는 전혀 없었지만,
대화 속에서 자연스레 드러나는 말투와 분위기로
이곳이 한국 교회에서 운영하는 카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의도치 않은 선택이었지만,
그 공간은 우리 가족에게 참 편안한 쉼이 되어주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잠시 숨을 고르며
조용한 오후를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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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많은 도시, 벳푸
그날 하루를 보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벳푸에는 유난히 교회가 많다.
걷는 동안 자주 눈에 띈 십자가,
카페 옆 골목에 있던 작은 성당,
그 모습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나중에 찾아보니
오이타현은 일본 기독교가 처음 뿌리를 내린 곳 중 하나라고 한다.
16세기, 포르투갈 선교사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일본에 기독교를 전한 이후,
이 지역은 초기 선교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고.
그래서일까.
벳푸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따뜻함이 있다.
소란스럽지 않고, 조용히 배려가 묻어나는 도시.
오늘 하루, 아이들과 함께 그 배려 속을 걷고 머물렀다.
여행이라기보단,
잠깐 살아보는 느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