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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진 Nov 06. 2023

전략적 미루기

마감에 대처하는 작곡가의 자세

    지금까지 내 글을 읽어보면 나를 근면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평소 나는 늘어져 있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이것은 나의 성격과도 연관돼 있는데 나는 급한 일이 있어도 지금 더 흥미를 끄는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다 보면 해야 할 일이 이렇게 저렇게 미뤄지다가 도저히 기한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을 때, 그러니까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시작한다. 학생을 가르칠 땐 과제나 연습을 미루지 말라고 잔소리했었지만 나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나중엔 어떻게 하든지 약속한 결과물만큼은 꼭 가져오라고 강조했다.


    나에게 영감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계획적이고 반복적인 노동에 가깝다. 시나리오를 읽고 가편집 영상을 보며 머릿속에 떠다니는 소리의 이미지를 표현할 악기와 효과를 찾기 위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이태리 명장이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기분이 이랬을까? 때론 몇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서 원하는 소리를 찾을 때까지 하나하나 들어본다. 밥을 먹거나 샤워할 때도, 축구를 보거나 잠을 잘 때조차 내 머릿속 한편에는 내가 쓸 곡에 대한 고민이 똬리를 틀고 있다.


    참 지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영감이나 마땅한 레퍼런스 없이 몇 날 며칠을 허투루 보낼 때도 많다. 사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물이 없는 만큼 스트레스로 점점 예민해진다. 일상생활은 똑같이 흘러가는데 마감일은 다가오니 속으로 끙끙 앓기 일쑤다. 과제가 밀릴 대로 밀린 방학 마지막 날의 기분이라고 표현하면 조금 비슷할까? 학생일 때와 다른 게 있다면 하지 못한 숙제는 잔소리로 끝날 수 있지만 녹음 일정과 방영 날짜가 정해진 드라마에 참여하는 작곡가가 마감 기한을 지키지 못한다면 신뢰를 잃을 수 있다. 나는 프로 작곡가의 능력에는 작곡의 완성도뿐 아니라 마감을 지키는 책임감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할 일을 미룬다니 무책임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마감 기한을 넘기지 않는 한 미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모레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 마크 트웨인


    그렇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감 기한이 지난 것도 아니다. 방금 프로 작곡가의 능력과 책임감을 운운해놓고 이제 와 무슨 말장난이냐 싶겠지만 나는 마감을 코앞에 두고 일부러 ‘딴짓’을 하는 경우가 많다. 딴짓, 달리 말하자면 스트레스를 줄이려는 일시적이고 의도적인 ‘현실도피’이다. 왜냐하면 스트레스는 작곡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겉으로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잡다한 일상생활을 통해 머릿속을 환기하고 어떻게든 아이디어를 떠올리려는 나의 애처로운 노력이고 발버둥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현실 도피적인 행동을 ‘일시적이고 의도적’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나는 어쨌거나 마감을 지킨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전체 일정에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시간을 더 요청할 때도 있고 아플 때는 어쩔 수 없이 양해를 구하기도 하지만, 이제껏 이유 없이 마감을 지키지 않거나 무책임하게 잠수를 탄 적은 없었다. 이게 지금까지 내가 프리랜서 작곡가로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이자 자세라고도 생각한다. 몰린 작업으로 인한 허리 통증 때문에 앉아 있기가 힘들었을 때도 며칠 동안 몇 시간밖에 자지 못했던 상황에서도 나는 마감을 지켰다.


    미루기가 일상적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일정이 여유로울 때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작업 일정은 굉장히 타이트하게 잡히기 때문에 나는 ‘미루기’라기 보다는 또 한 번의 에너지 분출을 위한 ‘휴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미루기가 본인의 페이스와 여유를 찾는 방식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마감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 시간 동안은 절대 자책하지 말고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며 타는 똥줄을 즐겨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게 작곡가의 숙명이라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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