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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한국의 인프라

by 맨오브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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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약 5년 반 살면서 독일 인프라에 익숙해졌나 보다. 귀국하고 이런저런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한국의 인프라는 참 독특하다고 느꼈다. 신기하고, 묘하고, 최첨단인데 어떤 것은 구식이다. 휴대폰 개통할 때, 주민등록등본 뽑을 때, 전셋집 찾을 때, 본인 인증할 때 등 여러 시스템을 써보면서 든 감상을 정리해본다.


휴대폰 = 신분증

휴대폰이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서비스를 이용하든 본인인증을 해야 한다. 그런데 휴대폰 외에 본인인증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있나 싶다. 휴대폰이 곧 신분증이었다. 아이핀처럼 한없이 불편한 서비스가 없어진 것은 좋다. 하지만 전자여권, 신용카드 등 보조수단이 1~2개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인인증서

공인인증서는 아직 죽지 않았다. 발급받는 과정이 좀 더 간편해졌을 뿐. 아직까지 필수템이라니 납득할 수 없다.


앱 까세요

독일에선 모바일 앱보다 데스크톱 웹을 많이 썼다. 은행, 정부 사이트, 온라인 몰 등이 웹 버전은 멀쩡한데 앱은 후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 한국은 정반대였다. 모바일 퍼스트를 온 사회가 실천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공단 사이트를 웹에서 들어가는 것은 지옥. 방화벽, 키보드 보안 플러그인 설치하라는 문구가 날 좌절시킨다. 반면 건강보험 앱은 처음에만 공인인증서 인증을 하면 다음부터는 지문으로 로그인할 수 있다. 건강보험뿐만 아니라 국민연금, 각종 간편결제, 은행, 통신사, 버스 예약, 국세청 등 귀국 후 설치한 앱이 20개가 넘는다. 물론 이만큼 앱이 많다는 것은, 대부분의 일을 전화나 우편(!) 없이 처리할 수 있다는 뜻. 편하긴 편하다. 은행 계좌를 열기 위해 우체국에서 여권으로 본인인증을 하고, 우편으로 계좌번호와 비밀번호가 날아오던 독일의 일상이 스쳐 지나간다.


간편결제 정글

예전엔 플러그인 설치가 천하의 악당이었다. 편리한 온라인 결제를 가로막는 원흉이었다. 지금은 온라인 결제가 너무 편하다. 할인, 캐시백 등 혜택도 많다. 다만 간편결제 종류가 많아지면서 돈 관리가 귀찮아졌다. 어느 페이에 얼마의 포인트, 캐시, 머니가 충전되어있는지 한눈에 보는 방법을 모르겠다(혹시 아시는 분이 계신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돈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간편결제 캐시 충전은 웬만하면 안 하고 있다. 충전하더라도 딱 결제금액만큼만 하고, 나머지는 카드와 연동된 결제 서비스 부분만 이용 중.


베를린은 아직도(!) 현금만 받는 곳이 많아 불편했지만, 반대로 현금과 카드만 있으면 충분했다. 온라인 결제는 전부 카드로 하면 됐다. 오프라인에서 카드결제가 되는 곳은 보통 카드리더기에 NFC가 장착되어 있어, 구글페이나 애플페이에 카드를 연동해놓으면 실물 카드가 필요 없다. 휴대폰을 갖다 대기만 하면 된다. 현금이 불편한 건 반박 불가지만, 수많은 간편결제 서비스를 일일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정신적 피로가 덜했다. 한국에서도 신경 안 쓴다면 안 쓸 수 있지만, 각종 캐시백과 혜택의 유혹은 거부하기 힘들다.


카카오톡 인프라

모든 알림이 카톡으로 온다. 전자제품 배송을 알리는 카톡이 오고, 배송 만족도 조사 카톡이 온다. 알림 섹션이 따로 구분되지 않아서 채팅 목록이 지저분해진다. 채팅 목록과 각종 알림이 뒤죽박죽 섞인다. 하나의 메신저가 이처럼 중요한 인프라로 작동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나 생각한다.


독일에서의 알림은 기본 이메일이다. 메일은 보관함에 순서대로 쌓여서 보기 편하다. 내가 어디서 뭘 샀는지, 뭘 배송받았고 안 받았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태그를 붙이거나 폴더를 만들어 내 입맛대로 정리할 수 있다. 반대로 카톡 인프라는 내가 통제하는 느낌이 적다. '고객님께선 그냥 숨만 쉬시고,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라며 떠먹여 주는 느낌. 편하다면 편하지만, 역시 어느 정도는 내가 주체적으로 통제하고 싶다.


개인정보가 보호는... 음...

주민등록등본을 무인발급기에서 뽑은 적이 있었다. '본인 인증은 어떻게 하는 거지?' 정답은 <지문을 스캔한다>. '내 지문 정보를 언제 저장해놨대?'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마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나의 지문 표본을 저장해놓은 것 같다. 추측건데 나의 지문 데이터는 전혀 암호화되어있지 않을 것이다. 편리해서 좋지만, 신경 쓰인다.


또한 모두가 모두의 휴대폰 번호를 공유한다. 그리고 카톡이 연락처에 있는 번호를 자동 연동한다. 전셋집 집주인님의 아들 사진, 부동산 사장님의 봄나들이 사진까지 다 보여준다. 관계의 경계가 뭔가 흐릿하다. 재밌는 건 나도 시간이 갈수록 이 흐릿한 경계에 신경이 덜 쓰게 된다. 모두가 모두와 친하진 않지만 약간의 사생활을 공유하는 묘한 상황.


빨리빨리

독일은 많은 것이 이메일 중심이라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 페이스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대신 그만큼 느리다). 한국은 전화, 문자, 카톡이 메인이라 내가 어디에 뭘 물어봤고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따로 트래킹을 해야 한다. 간결함과 표준화보다는 '빨리 답변받을 수 있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자서명

생각보다 꽤 보급되어있었다. 은행 창구에서도, 보험 가입할 때도 전부 전자서명이었다. 그런데 정수기 서비스 가입은 종이 서명이었다. 아직 표준으로 자리 잡은 느낌은 아니다. 부동산 계약도 전자서명으로 하면 뭔가 혜택을 준다는데, 아직 본 적은 없다. 물론 독일에서는 (업무 상 계약 외에는) 전자서명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


결론

더 이상 '결제가 안돼서, 본인 인증하기 힘들어서 짜증 나는' 과거는 없다. 한국에선 뭐든지 시원시원하게 진행할 수 있다. 디지털 인프라의 편리함은 세계 최고급이 아닐까 싶다. 다만 이것저것 써야 하는 가짓수가 많아져 되려 복잡해진 것도 있다. 현재의 빨리빨리 정체성 위에 강력한 개인정보보호+간결함이 자리 잡아준다면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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