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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오브피스 Jun 21. 2020

전자책보다 종이책이 더 나은 이유


한 때 '모든 콘텐츠를 디지털로 소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공간을 차지하는 물건을 보면 늘 치우고 싶다. 다 치워버린 후 비워진 공간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래서 디지털은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책은 모두 전자책으로 사서 아이패드로 읽으면 된다. 음악도 컴퓨터로 들으면 된다. 영화도 스트리밍으로 보면 된다. 게임도 디지털로 구입하면 디스크가 필요 없다. 원하는 콘텐츠를 마음껏 소비하면서, 공간은 빈 공간 그대로 둘 수 있는 마법이었다. 디지털은 세상을 먹어치우고 있다. 휴대폰으로 음악, 영화, 만화를 소비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종이 신문을 읽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게임도 점점 디지털로 구입하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소니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9년 1분기에 팔린 게임 중 53%가 디지털 판매였다.


나는 실물 매체가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DVD, 게임 패키지, 만화책을 직접 손으로 만지고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늘 있을 것이다. 효율과 편리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게 디지털로 바뀌고 있지만, 실물 매체가 멸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내용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물건으로 주변을 채운다. 그러면 그곳은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안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나 또한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물건이 없을 때의 단순함에 더 끌릴 뿐이다.


나는 다른 건 다 디지털로 소비하고 있지만, 책만큼은 종이책으로 회귀했다. 음악, 영화, 게임은 디지털이든 실물이든 최종 소비 형태가 동일하다. 어차피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다. 그 데이터를 화면에 띄우기 위해 어떤 도구를 사용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나중에 중고로 되팔 수 있냐 없냐의 차이가 있지만, 그건 사용자 경험과는 별개의 부분이다). 하지만 책은 다르다. 같은 책이라도 아이패드로 읽을 때와 종이책으로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르다. 처음엔 무조건 아이패드를 고집했다. 그러나 결국 종이책이 더 읽기 쉽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패드로 읽으면 자꾸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보고 싶어서 그래'라고 단순히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터넷을 완전히 꺼놔도 그랬다. 아이패드는 내 눈에 맞게 밝기, 글자 크기, 색깔을 조절할 수 있어 가독성이 더 좋은데도 그랬다. 공간을 차지 한다한들, 점점 더 종이책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뇌에 있었다.


종이책은 눈뿐만 아니라 종이의 촉감을 느끼면서 읽는다. 또 계속 읽다 보면 두께가 점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한다. 그게 손으로 느껴진다. 종이 냄새도 있다. 뇌는 이 모든 느낌을 종합해 하나의 지도를 구축한다고 한다. 특정 내용이 '몇 페이지에 있는지'가 아니라 '어디쯤 있었는지' 위치 정보를 만든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어디서 나왔더라...'라며 읽었던 페이지를 뒤적거렸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전자책으로 읽을 때는 그런 위치 정보가 뇌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용은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수록 기억에 더 잘 남는다. 종이책은 내용을 텍스트뿐만 아니라 두께, 촉감, 냄새,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로도 전달한다. 종합된 정보가 뇌를 자극해 나를 더 몰입하게 만든다. 그 사실을 안 뒤부터, 책은 웬만하면 종이책으로 읽었다.


뭔가를 소비할 때는 그게 나에게 주는 가치가 무엇인지, 어떤 형태가 가장 적합한지 따져봐야 한다. 일률적으로 통합하고 단순화하고 싶은 유혹은 늘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지, 혹시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거 아니면 저거'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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