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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오브피스 Sep 13. 2020

메모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까?

10대 때의 나는 노트를 마구 휘갈겨쓰는 학생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쳐진 줄은 전부 무시하고, 내키는 대로 메모하고 낙서했다. 나중에 읽어보면 내가 무엇을 적었는지, 왜 적었는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해 낙서를 이리저리 훑어야 했다. 내 노트에는 체계가 전혀 없었다. 첫 모의고사 성적은 뒤에서 두 번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학생 때와 정반대로 행동했다. 체계에 집착했다. 하루 종일 에버노트를 만지작거렸다. 글을 쓰고, 이미지를 삽입하고, 내용에 맞는 태그를 붙이고, 비슷한 글끼리 묶고 정렬하는 작업. 보기 좋게 정리해놓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하나의 세계관을 주물럭거리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나만의 규칙으로 돌아가는 세상. 내가 시키면 그 즉시 규칙이 실행되는 세상. 내가 모은 정보와 지식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의미 있는 작업이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저 기분 좋음을 좇아 정리에 집착했던 것 같다. 디지털 세상에는 꽤 오래전부터 '검색'이라는 것이 있다. 에버노트 같은 노트 애플리케이션에도 있다. 키워드를 입력하기만 하면 즉시 관련 메모를 보여주는 강력한 기능. 아무리 메모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다고 해도, 그 체계를 훑어가며 내용을 찾는 것보다 검색이 빠르다. 그러니 메모를 굳이 정리할 필요가 있냐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중요한 메모, 자주 확인해야 하는 메모는 체계를 잡아놓는 것이 좋다. 하지만 대부분의 메모는 잡다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리 쓸모 있지 않다. '만약 키워드가 생각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도 드는데, 키워드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면 필요 없는 메모일 확률이 높다.


이런 생각이 들고 나서는 에버노트를 쓰지 않게 됐다. 구글 킵으로 옮겼다. 구글 킵은 포스트잇 형태로 메모를 쌓아갈 수 있는데, 쉽고 빠르게 메모할 수 있는 반면 체계를 잡기는 어렵다(태그 기능이 전부다). 하지만 구글 제품이라 검색이 빠르고 정확하다. 검색이 강력하니 체계 자체가 필요 없다. 대충 메모를 쌓아놓기만 하면 된다. 서랍에 잡다한 물건을 다 쑤셔 넣는 느낌. 정리가 안 되어 있으니 깔끔하진 않다. 오히려 뒤죽박죽이라 못생겼지만, 검색이 있으니 본질에 충실하다. 서랍 물건은 내가 직접 찾아야 하지만, 메모는 구글한테 찾아달라고 하면 된다. 평생 찾을 필요가 없는 메모는 결국 묻힐 것이다. 자연스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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