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운 계절 촉박한 마음

가을이란 글자를 천천히 써주면 좋겠는데 여름의 초시계가 째깍째깍 끝나버려

by 마누아 브르통

햇살도 그렇게 따스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밖으로 한 발자국 떼기가 어렵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의 색과 햇살과의 조화를

눈으로만 담고 있고 내 발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직 따스하잖아.'라는 내 속에서 전해지는 말이

'곧 차가워질 거야.'라는 말과 동질하게 느껴진다.


라인강 옆 한 공원에 만연한 가을

매번 이 계절쯤인 것 같다.

아니면 한 달 뒤쯤이었을까?


꼭 매번 여름이 끝나가는

아직은 따스한 시기였던 것 같다.


마음 통 속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너무 큰 소리를 한꺼번에 내고 있어서

무슨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나가서 이 계절을 만끽하고 싶은데

발걸음 하나 문 밖으로 내어 놓는 것이 어려운

지금의 나와,


하고 싶은 것이 많은 것 같은데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몰라

시작하지 못하는 상황


이 두 가지가 묘하게 닮아있다.


너무 헷갈린다.

하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할 수 없어 답답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내 마음과 몸이

같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상하게 이 시기만 되면

한 해가 끝나는 것 같아 아쉽다.


빨리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은

그저 가득한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만히 있자니 무언가 잘못하는 것 같다.


이럴 때 한 가지만 해보라고 하더라.

하지만 맛있는 음식도 좋은 풍경도

새로운 취미도 나를 채우지 못한다.


그리고 나의 한 해 또한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아 아쉽다.

이제 몇 달 남지 않은 올해 또 한 해 말이다.


꼭 무엇인가로 채워야 하는 것일까 싶지만

비워질 때 자연적으로

채워질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 같다.


비워진 공간을 바라보자면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내 잘못이라 여기며

나를 책망하는 시간으로 하루를 때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를 탓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로는

나를 책망하는 소일거리마저도 없어져 버렸다.


무엇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알고는 있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내가 죽은 것 같다.


하지만 무언가를 하기엔

내 마음이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럴 땐 입을 꾹 닫고 그저 많이 담고만 있다.

마음 통 속의 깊이 숨은 이 이야기들을

불 지를 수도 물을 부어 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더운 여름 내내

'지금은 쉬어야 하는 시간이야'라며

나를 안심시키고 모른 척 눈도 감아주었다.


하지만 그 시간도 지나고

이제 결과를 내어 보아야 하는

한 해의 끝에 다가 올 수록

옅었던 내 조바심이 짙어진다.


누군가 감시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저 내 시간에 내가 쫓겨

가장 너그러운 계절에

나만 달달 볶고 있다.


아니, 원망도 볶는 일도 소용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이 깨달아질 것도 같은데

교통체증같이 꽉 막힌 내 마음 통에서

내 목소리의 길목까지 아무것도 내어 놓을 수가 없다.


이 시기에 자주 그랬던 것 같다.

지나왔던 비슷했던 순간에 저장된 느낌

그래 그랬던 것 같다.

라인강 옆 한 공원에 만연한 가을

가을이 너그럽게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를 만들 수 있는 시기를 허락했지만,


무엇에 끌려가는지 모르는 채

그저 끌려가며

햇살조차 눈뜨고 제대로 볼 여유 없는 시간 속에

그대로 살았던 것


어쩌면 지금도

또 그렇게 끌려가길 기다리는 것 같다.


그토록 끌려가는 것을 원치 않아

여름 품에 숨어 도망쳤던 내가

너그럽지만 더 이상 숨겨주지 않는 가을에

아직 용기가 나지 않는다.


자꾸만 핑계를 댄다.

이제는 댈 수 있는 핑계도 없다.

그런데도 반복하고 싶은가 보다.


어린 시절 미술 시간

준비해 놓은 지점토를

실컷 봉지를 다 열어 놓고서는

정작 아무것도 시작하고 싶지 않아

갑자기

어디론가 마구 뛰어가는 것


지점토가 다 굳어버리면

아무것도 만들 수 없어질 텐데

내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가장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시간인데

그토록 원하던 시간이 왔는데도

온갖 핑계를 들었다 놨다 반복한다.


[글쓴이의 말: 글이 혼란해요. 그땐 그랬습니다. 10월 초에 작가 신청하기 전에 써 놓았던 글인데 이제서야 어느덧 그런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아 용기 내어 발행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