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스틴 이야기 4. 일어나야 하는 일이 일어났을 뿐
가브리엘은 이런 상황을 당황스럽게 여긴다. 감정적인 상황을 마주하면 늘 아무 말하지 않고 기다린다. 그런 가브리엘이 입을 뗀다.
“야 다 왔네. 일단 빵이나 주문하자.”
‘아 그럼 그렇지.’
빵집으로 걸어가며 하는 이야기 치고는 너무 깊어졌다 싶었는데, 우리의 발걸음은 딱 타이밍이 좋게 어느덧 빵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창가에 햇살이 마음에 드는지 가브리엘이 잽싸게 앉아 가방을 의자에 걸고 외투를 덮었다.
"우와 초콜릿으로 조각을 했네?" 가브리엘이 의자에 앉으려다 다시 초콜릿 조각 장식 앞으로 다가간다. 가브리엘이 말하는 곳을 보니 초콜릿으로 만든 커다란 조각상이 있었고 그 옆에도 작은 초콜릿 조각품들이 있었다. 그것을 같이 구경하는 동안 직원이 주문한 빵과 음료를 우리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초콜릿 조각상 옆에서 우리 자리를 바라보자니,
밖에 보이는 푸른 풍경과 우리의 아직 제법 두꺼운 옷차림은 상반되어 보였다.
'6월이 다되어가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추울까?'
그러다 문득 가브리엘을 쳐다보는데, 초콜릿 조각상을 보고 있는 가브리엘의 무드는 푸른 바깥 풍경 같았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그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의자에 걸려있는 두꺼운 외투의 무게 같았다.
내가 바라보는 곳을 가브리엘도 쳐다보더니, 우리 자리에 놓인 빵과 음료를 발견하고는 말한다.
“빵이 왔네. 어서 가서 먹자. 맛있겠다.”
아파서 검사하러 병원 온 사람치고는 꽤 괜찮은 혈색이다.
아까 했던 이야기를 다 못한 것이 마음에 자꾸 남는다.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며 샌드위치를 집어드는데, 내 얼굴을 빤히 보던 가브리엘이 말한다.
“말해. 뭐,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가브리엘, 난 사실 발렌타인이 떠나고 너무 후회됐어."
이 밝은 햇살을 받으며 할 말한 대화인가 싶긴 한데 그냥 이대로 마음에 두기는 어려웠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을 못한 것 아닐까? 해야 할 말을 해야 할 때에 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났다.
“내가... 한 번이라도 관심을 더 가져줬다면 내가 더 물어봐 주었다면 그런 거 말이야.”
가브리엘이 왼쪽 눈썹을 치켜들며 대답한다.
“지금 내가 아파서 이 이야기 꺼내는 거야? 그때처럼 후회할 일 만들지 말아 달란 거야?"
이렇게 말을 하고는 피식 웃는다.
'매정한 것.'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읊조린다.
그리고 이어서 가브리엘이 계속 이야기한다.
"난 발렌타인이 아니야. 그리고 발렌타인이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는 건 너 때문이 아니란 걸 너도 잘 알잖아.”
“나 때문이 전혀 아닌 게 맞을까? 내가 더 노력했다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나도 모르게 내 마음속의 이야기를 꺼내버렸다.
가브리엘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있다.
내가 감추고 감춘 마음속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놓게 만든다.
“여보세요, 우리 이건 이야기 많이 했을 텐데. 어떻게 매번 다가오는 죽음을 네가 다 막을 수 있겠어. 우리에게는 아픔과 슬픔으로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발렌타인의 삶이 거기가 마지막이었더라면? 우리가 그런 것을 정할 수는 없잖아. 오래 아팠고 오래 앓았어. 네가 의사인 것은 맞지만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고.”
맞다.
맞는 말인데, 내 말에 공감은 하는 것인지 아닌지 가브리엘의 표정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그렇게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가브리엘이 계속 말을 이어간다.
“그렇게 다 살리면 지금 인구가 몇 명이게? 우리 증조 고조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다 살려 놓게? 나폴레옹도 살리지 왜? 루이 14세나 귀욤 르 콩퀘랑(중세 정복왕 윌리엄 1세)*은 어때? 그렇게 다 살아 있으면 이 지구는 멸망해. 아니 벌써 멸망했지.”
방금까지 너무 심각했는데, 역시 이럴 때 보면 가브리엘은 어둠에 어떠한 여지조차도 내어주지 않는 것 같다. 어이가 없기도 하다. 마치 어둠과는 절대 협상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사람 같다.
‘그래도 그렇지 내 이야기를 좀 더 진지하게 들어줄 수는 있잖아. 참네…’
이럴 때 보면 너무나 단호해서 가브리엘 말로 무엇이든 썰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따스한 햇살에 눈 부시게 빛나고 있는 머리칼을 정리하며 가브리엘이 아까보다는 조금 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쥬스틴, 있잖아. 우리는 완벽할 수 없어. 인간이잖아. 그냥 너는 발렌타인을 옆에 두고 지낸 것만으로도 너의 최선을 다한 거야. 그 사건에 모든 상황을 대입하지 말았으면 해.”
'뭐라고 말을 해도 넌 내 마음을 알긴 아는구나. 네가 그렇게 매정하지만은 않지 않아. 그렇지 그래.'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가브리엘이 입을 꾹 닫고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코로 깊게 숨을 들여 마셨다가 크게 내쉰다. 무언가 비장하고 단호한 얼굴을 하고는 다시 말한다.
“그리고 발렌타인은 이제 여기 없어. 그 일은 이미 한참 지난 일이야. 우리는 다가올 시간을 살아가야지. 발렌타인? 걘 널 원망하지 않아. 내가 보기에는 네가 너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은데."
가브리엘이 내 마음을 조금만 더 알아주면 좋을 텐데 싶다가도, '아니 왜 내가 이 아픈 애한테 내 마음 아픈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고 있지?'라는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그렇지만 가브리엘이 방금 한 이야기는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가브리엘은 계속 말을 했고 나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빵집에 흘러나오는 프랑크 시나트라의 재즈 음악에 내 마음은 실어 보내고, 내 정신은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 사이 어디쯤으로 통과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음악이 전혀 안 들릴 만큼,
밖에 나갔던 내 정신이 한 번에 돌아올 만큼,
날카로운 가브리엘의 단어들이 내 귀에 꽂혔다.
"자책하면 좀 후련해? 아님 스스로 위로가 돼?”
“뭐... 뭐라고? 내가 힘들어한다는 것 잘 알면서 후련하냐니.”
가브리엘의 말에 갑자기 마음에서 뜨겁고 검붉은 것이 불쑥 솟아 나오는 듯했다.
씹고 있던 샌드위치를 뱉어낼 뻔했다.
“네가 사디스트도 아니고 매조키스트도 아니고, 누구를 위한 자책이냐고. 그걸로 네가 얻는 것이 있어?”
가브리엘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뎅 뎅 뎅’ 종이 친다는 말이 이런 말인가? 머리를 한 대 아니 몇 대 맞은 것 만 같았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맞다. 내가 얻는 것이 없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자책하고 있었을까?
갑자기 멍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것을 가브리엘에게 말해주고 싶어졌다.
가브리엘이 나만큼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내 생각을 알려주면 다른 답을 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내가 좀 더 그때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리고 앞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런 일을 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가브리엘이 크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입가에 힘을 주며 미소를 띤다. 그리고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럼 피하지 말고 그냥 담담하게 맞아 보는 건 어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나는 가끔 가브리엘이 신박하다.
“그냥 그런 거 있잖아. ‘일어나야 하는 일이, 일어나야 할 때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받아들이는 것 말이야”
*귀욤 르 콩퀘랑 (Guillaume le Conquérent) : 정복왕 윌리엄 1세(William I, the Conqueror)로 불리는 노르망디 공작이자 잉글랜드 초대 정복왕이다. 역사적 인물로 유럽 중세 시대의 가장 강하고 영향력 있는 군주로 손꼽히며, 1066년에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다. 그로 인해 앵글로 노르만 왕조를 세우게 된다.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소설. 이제 꺼져 몰리토, 자책과 두려움
[글쓴이의 말: 분량조절 실패로 뒷부분은 다음화로 넘어갑니다. 스토리 연결을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 한 편에 다 쓰고 싶었는데 너무 길어졌네요. 다음화를 기대해 주세요.]